2008년 5월 4일 일요일

행정가의 직업경로 분석(역사적 인물의 직업경로 분석)

경기대학교 대학원 직업학과 박사과정 리포트


역사적 인물의 직업경로 분석





2007.11.



지도교수: 김 병 숙

제 출 자: 최 병 훈

















역사적 인물의 직업경로 분석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부분은 각자의 적성·흥미·가치보다

는 일반적으로 거론되는 몇몇 직업에 종사해야만 성공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이런 획일적이고 왜곡된 직업관 때문에 그런 유형의 직업에 취업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치르고, 그 경쟁에서 실패한 많은 사람들은 다른 유형의 직업을 찾기보다는 실업자로 되면서 삶에 대한 의욕이 저하되고 생을 비관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어렵게 취업에 성공한 경우에도 하는 일에 열정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몇몇 직업에 속하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실패한 사람으로 비치거나, 자신의 적성과 흥미에 맞는 직업에 종사하는 경우에도 소위 몇몇 성공적 직업이 아니라는 왜곡된 직업관 때문에 자신의 직업에 긍지를 가지지 못하는 터무니없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 많은 청년층 실업의 遠因이 사회나 개인의 왜곡된 직업관에서 비롯되거나, 장기간에 걸친 체계적 진로탐색·결정 및 그에 따른 준비 부족에 있다.

이를 지원하는 방법의 하나로 우리 역사상 성공한 직업인을 모델링하는 방안이 제시되었다. 김병숙(2006)에 의하면,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소개할 만한 인생의 스승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현재 직업적으로 성공한 인물’을 꼽은 경우가 37.4%로 가장 높았고, ‘우리나라 역사적 인물’을 꼽은 경우가 24.6%로 그 다음을 차지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우리나라 역사적 인물’이 상대적으로 낮은 것은 그 중요성이 낮아서라기보다는 정보수집의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즉 ‘현재 직업적으로 성공한 인물’의 경우에는 인물이 갖는 직업적 행로와 행동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데 반하여, ‘우리나라 역사적 인물’은 관련정보가 제공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순위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 역사적 인물’이 갖는 직업적 경로와 행동에 대한 정보가 개발되어야 함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 연구는 우리나라 역사적 인물이 갖는 직업적 경로에 대한 정보 개발의 한 과정으로서 청소년들이 성공한 직업인을 현실적으로 모델링할 수 있도록 직업경로를 구체적으로 제시해 보는 데 그 목적이 있다.




2. 연구방법


문헌연구를 중심으로 하되, 다음과 같이 선행연구에서 제시한 9개 분야별로 1명씩 선정하여, 각 개인의 성장과정 → 직업(관직)생활(→ 퇴직 후의 생활) → 평가 순으로 분석하였다. 사람마다 출발시점이 빠르거나 느릴 수 있으나, 가급적 연령대별로 직업경로를 제시하여 생애주기를 볼 수 있도록 고려하였다.

표1. 유형별 분석대상 인물

번호
구 분
대표적 인물

1
인간의 무한능력을 증명한 인물
이황

2
경영능력이 뛰어난 인물
김춘추

3
도전적인 진로를 개척한 인물
허준

4
무에서 유를 창조한 인물
장영실

5
올바른 직업관과 윤리관을 구현한 인물
맹사성

6
투철한 국가관의 자기희생적 인물
계백

7
동시에 다양한 직업(multi-job)을 구현한 인물
정약용

8
고도의 전문성을 추구한 인물
이규보

9
은퇴 후 직업활동 전개
이제현







3. 직업경로 분석


3-1. 이 황(李滉, 1501~1570)


○ 성장과정


1501년 경북 안동에서 좌찬성 식(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6세조(碩)는 고을의 아전으로서 사마시에 합격하고, 5세조(子修)는 벼슬이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 고조(云侯)는 군기시 부정(軍器寺副正), 증조(禎)는 선산도호부사(善山都護府使)였으며, 조부(繼陽)는 성균진사(成均晉士)였는데, 이 분이 예안(禮安)으로 우거하여 온계리(溫溪里)에 거주하였다.

이처럼 대대로 벼슬하는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생후 7개월에 부친상을 당하여 6세에 이웃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웠고, 12세에는 숙부에게 논어를 수학하고 사서삼경을 순차적으로 익힌다. 14세에 이미 도연명의 시를 애독하고 그 사람됨을 사모하였다고 한다. 17세 때 당시 관찰사 김안국이 순행중에 이해·이황 형제를 보고 매우 기뻐하여 학자금을 주고 격려한 바 있으며, 이황은 학업에 열중하다가 병을 얻기도 하였다. 18세에 야당(野塘)이라는 시를 지었는바 그의 가장 대표적인 글이며, 이 때 안동 향교에서 학업을 닦았다. 19세에 성리대전을 읽었으며, 20세에 주역을 읽었다. 이 과정에서 침식을 잊다시피 열중하여 평생의 지병을 얻게 되었다.

23세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심경을 처음으로 읽으면서 "내가 심경을 보고나서야 심학의 연원과 심법의 정미함을 알게 되었다. 초학자가 공부할 것으로 이 책보다 긴요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27세에 향시(鄕試)에서 진사시와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였고, 이듬 해에 성균관에 들어가 진사 회시에 급제하였으며, 33세에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하고 심경부주(心經附註)를 입수하고 크게 심취하였으며, 김안국(金安國)을 통해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 관직생활

34세(1534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고, 39세에 홍문관수찬이 되었다.

41세에 독서당에 선발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고, 이듬해 홍문관 부교리가 된 뒤 옥당에 숙직하면서 지은 매화시가 있는데, 벼슬을 그만 두고 귀향하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다. 이황은 매화를 좋아하여 평생 200수가 넘는 매화시를 지었다. 43세에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삼아 사가를 청해 고향으로 되돌아가 주자전서를 읽었다. 46세에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의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얽어서 산운야학(山雲野鶴)을 벗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 생활에 들어갔다. 이때에 토계를 퇴계(退溪)라 개칭하여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48세에 단양과 풍기(형이 충청감사가 되어 옴을 피해 봉임 전에 청해서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 군수가 되었고, 백운동 서원의 편액을 내려주도록 요청하였다.

52세에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고, 58세에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였다.

68세에 홍문관 제학에 임명되었고, ‘성학십도’를 지어 임금께 바쳤다.


○ 관직 후 생활

60세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이로부터 7년 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훈도하였다. 68세 노령에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무진육조소 戊辰六條疏〉를 올렸다. 69세 때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번번이 還故鄕을 간청해 마침내 허락을 받았으며, 70세(1570년)에 세상을 떠났다. 11월 종가의 시제 때 무리를 해서인지 우환이 악화되어 그 달 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 달라 해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易愁 : 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하였다. 선조는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영사를 추증하였다. 1574년 고향 사람들이 도산서당 뒤에 서원을 짓기 시작해 이듬해 낙성, 도산서원의 사액을 받았다. 1576년 2월에 위패를 모셨고, 11월에는 문순(文純/문은 道德博聞을, 순은 中正純粹를 뜻함)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 평가: 인간의 무한능력을 증명한 인물

<표2> 이황의 자기계발 과정

1553년

(53세)
○ 정지운(김안국·김정국 형제의 제자)의 「천명도설」을 개정

1554년

○ 「역범제도병」의 발문을 짓다.○ 포은 정몽주의 제문을 짓다.○ 연평문답(주자가 그 스승 이동에게 배운 것을 정리한 책)의 발문을 썼다. ○ 「계몽도서절요」의 발문을 썼다.

1556년

○ 『주자서절요』(주자의 방대한 글 중 학문에 관계된 것과 실용에 절실 한 것을 선별)를 완성

1557년

○ 『계몽전의』(주자의 『역학계몽』에서 난해한 곳, 의문이 있는 곳을 풀이한 것)를 완성

1558년

○ 『자성록』(벗들과 주고 받은 편지 중에 골라 모아 반성의 자료로 삼은 것)을 완성○ 제자들에게 인심도심설과 선기옥형을 강의

1559년

○ 「이산서원기」를 짓다. ※ 이산서원은 영주의 선비들이 세운 서원, 그가 서원의 기문과 원규를 지어 보냈으며, ‘이산서원원규’는 뒷날 영남지역 서원의 강령이 되었음○ 『고경중마방』(선현의 글 중 수양에 긴요한 글을 모아 편집한 책)을 완성○ 『송계원명이학통록』(주자서와 어류, 실기, 일통지 등을 참고로 하여 송말, 원, 명 시대 유학자들의 전기를 정리한 책)을 편찬

1560년

(60세)
○ 기대승의 편지에 회답하여 사단칠정을 변론 ※ 이에 앞서 고봉 기대승이 「천명도설」을 보고서 사단과 칠정을 이와 기로 나눈 것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였다. 1559년 기대승의 편지로부터 시작하 여 8년 간에 걸쳐 사단칠정에 대하여 집중적인 토론을 벌여, 우리나라의 유 학사에 빛나는 금자탑을 쌓음.

1561년

○ 도산서당이 완공되고, 이로부터 도옹이라는 호를 썼으며, 이곳에 서 독서하고 사색하며, 찾아오는 문인들과 강학.

1562년
○ 『이락연원록』의 발문을 짓다.

1564년

○ 「무이구곡도」의 발문을 짓다.○ 정암 조광조의 행장을 짓다. ○ 「심무체용변」(연방 이구의 '마음에는 체용이 없다'는 글에 대하여 비판한 것)을 짓다.

1565년

○ 「서원십영」시를 짓다. ○ 「도산십이곡」의 발문을 쓰다. ※ 12곡의 전6곡은 언지(言志)이고 후6곡은 언학(言學)임○ 「인심도심도」를 개정

1566년

○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으로 임명을 받았으나, 가지 않음 ※ 현인을 초빙하고자 하는 명종의 뜻이 간절하였으나, 그가 사양하고 나가지 않자, 도산서당을 그림으로 그리고, 여성군 송인을 시켜 이황이 지은「도 산기」와 「도산잡영」을 적어 병풍을 만들어 가까이 두고 보았다고 함○ 손님을 사절하고, 문인들에게 『심경』과 『참동계』 또는 주자서를 강의○ 「심경후론」을 짓다. ※ 『심경』은 남송의 유학자 진덕수의 저작이다. 이황은 이 책을 존중하여 사자서, 『근사록』보다 못하지 않다고 하였음○ 「전습록논변」을 짓다. ※ 왕수인의 학설이 식자들 간에 유행하는 것을 보고, 양명설을 반박○ 10월, 이언적의 행장을 짓다.

1568년

○ 「역동서원기」를 짓다(서원의 이름을 정하고 편액 글씨를 썼다) ○ 「무진육조소」(선조에게 치자의 도리와 당면 시무를 건의한 것)를 지어 올 리다. ○ 경연에서 임금에게 정이천의 「사물잠」과『논어』『주역』, 장횡거의 「서명」과 『소학』을 강의○ 임금에게 「성학십도」를 지어 올리며, "나의 보국은 이것 뿐이 다"라고 함.

※ 임금은 이것을 병풍으로 만들어 두라고 하였음.

1569년

○ 이조판서에 임명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음.○ 판중추부사를 제수받고서 물러가기를 청하여 허락을 받음. ※ 이 자리에서 임금에게 『대학』의 8강령과 「심통성정도」의 요지를 설명○ 도산으로 돌아와 지냈다. 도산 매화와 주고받은 시가 있음.

1570년

(70세)
○ 제자들과 역동서원에 모여 강론. ○ 도산서당에서 제자들과 『역학계몽』을 강론.○ 역동서원에서 문인들과 『심경』을 강론.○ 역동서원 낙성. 위패의 칭호와 제의, 서원규약 등을 정함.○ 기대승에게 글을 보내, 「심통성정」을 논함.○ 기대승의 편지에 회답하여 격물치지설을 고침.○ 12월 8일, 세상을 떠남

※ 12월 17일, 대궐에 부고가 올라가자 영의정으로 증직하고, 상장례에 대신의 예를 쓰도록 함. ※ 3일간 조회를 정지하고, 승지를 보내어 조문하고 제사를 지내도록 함

1572년
○ 영주의 선비들이 위패를 이산서원(영주, 이산면 소재)에 모심.

1573년
○ 임금이 예조에 "이황의 저서와 문자는 후세에 전할 만 하다"라고 전교하고, 교서관에서 인출하라고 명함.○ 도산서원이 낙성되고 나라에서 편액을 내려 보냄.

1574년
○ 위패를 도산서원에 봉안. ※ 여강서원(안동 월곡면 소재)에서도 위패를 봉안.○ 문순(文純)이라는 시호를 내림.

1600년
○ 퇴계선생문집 초간본 31책이 간행됨.

1610년
○ 종묘의 선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성균관의 문묘에 배향하다.

1792년
○ 정조가 각신 이만수를 보내 도산서원에서 치제하였다. ※ 이 때, 서원에서 과거를 보았는데, 응시자가 만여 명이 되고, 뒤에 시사단을 세워 이 사실을 기념하였음.






- 학문


이황이 ≪주자대전≫을 입수(명나라 嘉靖刊本의 復刻本)한 것은 그의 나이 43세 때였으며, ≪주자대전≫을 읽기 시작한 것은 풍기군수를 사퇴한 49세 이후의 일이었다. 이황은 이에 앞서 이미 ≪심경부주≫·≪태극도설≫·≪주역≫·≪논어집주≫ 등의 공부를 통해 주자학의 대강을 이해하고 있었으나, ≪주자대전≫을 완미(玩味)함으로써 그의 학문이 한결 심화되었고, 마침내 주희의 서한문의 초록과 주해에 힘을 기울였다. 그의 학문이 원숙하기 시작한 것은 50세 이후부터라고 이야기 되는 바, 50세 이후의 주요학구 활동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53세에 鄭之雲의 天命圖說을 개정하고 後敍를 썼으며, 延平答問을 교정하고 後語를 지었다. 54세에 盧守愼의 夙興夜寐箴註(숙흥야매잠주)에 관해 논술하였고, 56세에 향약을 기초, 57세에 易學啓蒙傳疑를 완성, 58세에 ≪주자서절요≫ 및 ≪자성록≫을 거의 완결지어 그 序를 썼으며, 59세에 黃仲擧에 답해 白鹿洞規集解에 관해 논의하였고 奇大升과 더불어 사단칠정에 관한 질의응답을 하였다. 61세에 李彦迪의 太極問辨을 읽고 크게 감동하였고, 62세에 傳道粹言을 교정하고 발문을 썼으며, 63세에 宋元理學通錄의 초고를 탈고해 그 序를 썼다. 64세에 이구(李球)의 心無體用論을 논박했고, 66세에 이언적의 유고를 정리, 행장을 썼고 心經後論을 지었다. 68세에 선조에게 〈무진육조소〉를 상서했으며, 〈사잠〉·≪논어집주≫·≪주역≫〈서명〉 등을 강의하였으며, 그간 학구의 결정체인 ≪성학십도≫를 저작하여 왕에게 헌상하였다.

이황의 학문은 일대를 풍미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를 통해 영남을 배경으로 한 主理的인 퇴계학파를 형성해 왔다. 그리고 도쿠가와(德川家康) 이래로 일본 유학의 기몬학파(崎門學派) 및 구마모토학파(熊本學派)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 왔다. 또한, 개화기 중국의 정신적 지도자에게서도 크게 존숭을 받아,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3국의 도의철학(道義哲學)의 건설자이며 실천자였다.


- 기대승의 평가


이황은 중종23년(1528년) 진사시에 합격했고, 1534년 문과에 올라, 승문원 부정자(副正字)가 되었다. 박사로 전임했다가 성균관 전적 · 호조좌랑으로 옮겼다. 1537년(37세) 겨울에 모친상을 당했으며 상복을 벗자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고 사간원 정언 · 사헌부 지평 · 형조정랑 · 홍문관 부교리 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문학 · 의정부 검상(檢詳)을 거쳐, 의정부 사인(舍人) · 사헌부 장령(掌令) · 성균관 사예(司藝) 겸 시강원 필선(弼善) · 사간원 사간 · 성균관 사성으로 전임한 다음, 휴가를 청해서 선대 묘소에 성묘하였다. 중종 39년(1544년) 봄에 홍문관 교리로 부르는 명을 받고, 서울에 돌아가 좌필선(左弼善)에 임명되었다. 홍문관 응교(應敎)로 전임했고 전한(典翰)이 되었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사옹원 정(司饔院 正)이 되었다. 다시 전한에 임명되었는데, 이기(李芑)가 관직을 삭탈하기를 청했다가 잠시 후에 기(芑)가 또 삭탈하지 말기를 청해서 사복시 정(司僕寺 正)에 임명되었다.

명종 1년(1546년) 봄, 휴가를 청해서 외숙부의 장례를 지내고, 병으로 면직되었다. 1547년 가을에 응교에 임명되어 부름을 받고 서울에 가서는 병으로 사직했다. 1548년 정월, 단양군수로 나갔다가 풍기군수로 전임되었다. 기유년 겨울에 병으로 사직하고 바로 돌아왔다가 탄핵을 받아 두 품계가 삭탈되었다. 1552년 여름에 교리로 임명되어 부름을 받고 조정에 돌아가서는 사헌부 집의에 임명되었고, 다시 부응교로 전보되었다. 품계가 승진하여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고 병으로 면직되었다가 다시 대사성이 되었다가 형조참의 ·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모두 병으로 사직하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명종 10년(1555년) 봄에 휴가 중에 해직된 다음, 배를 세내어서 동쪽으로 돌아왔다. 그 후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며 홍문관 부제학으로 임명되어 연달아 부르는 명령을 받았으나 모두 병으로 사직했다. 1558년 가을,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고 부르는 명령도 거두어 주기를 청했으나 임금은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批答 : 상소에 대한 임금의 답변)을 내렸다. 도성에 들어가서 은혜에 사례하니 대사성에 임명하였다가 잠시 후에 공조참판으로 임명되어 여러 번 사직했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다음해 봄에 휴가를 청해 시골에 돌아왔고, 세 번이나 글을 올려 면직되기를 청해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임명되었다. 1565년 여름에 글을 올려 간곡하게 아뢰어서 관직을 그만두고 집에 거처하였다. 그해 겨울에 특별히 부르시는 명령을 내려 다시 동지중추부사로 임명하였다. 명종 21년(1566년) 정월에 병을 참고 길을 떠나, 글을 올려서 사직을 청하였는데 서울로 가는 도중에 공조판서에 임명되고 또 대제학에 겸직되었다. 마침내 새로 임명한 관직을 힘써 사퇴하고 집에 돌아와서 죄받기를 기다리니 지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1567년 봄에 중국에서 사신이 온다고 하여 부르시는 명이 있어 6월에 도성에 들어갔는데, 마침 명종이 승하하고 지금 임금(선조)이 뒤를 이었다. 예조판서로 임명되어 사퇴했으나 허락되지 않았고 후에 병으로 면직되어 곧 동쪽으로 돌아왔다. 10월에 부르시는 명이 있어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고 이어 교서를 내려서 올라오기를 재촉하므로, 상소를 올려 힘써 사퇴하였다.

선조 1년(1568년) 정월, 의정부 우찬성에 임명되었는데, 또 상소를 올려 명을 받기 어려운 의리를 지극하게 아뢰었다. 또 교서를 내려서 올라오기를 재촉하므로 상소를 올려서 간곡하게 사퇴했더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전임되었다. 7월 대궐에 나아가서 사직하고 상소하여 여섯 조목을 아뢰고, 또 聖學十圖를 바쳤다. 그 뒤 대제학 · 이조판서 · 우찬성으로 임명됐으나 모두 힘써 사퇴하여 받지 않았다. 기사년(선조 2, 1569년) 3월에 차자(箚子)를 올려서 돌아가기를 청하여, 네 번이나 차자를 올리면서 그만두지 않았다. 임금도 그를 만류할 수 없음을 알고 불러서 보시며 위로하는 말씀을 하고, 각 역에 행차를 호송하도록 명했다. 그 달에 선생께서 집에 돌아와, 글을 올려서 은혜에 사례하고 이어서 치사(致仕 : 나이가 연로하여 관직에서 물러나는 것)를 청했다.


- 퇴계관련 일화(청빈, 구도의 길)


퇴계가 젊어서 과거를 보러 서울로 가는 길에 수행한 종아이가 남의 밭에서 따온 콩을 놓고 밥을 지어서 올렸다. 퇴계는 그 밥을 먹지 않음으로써 종아이의 버릇을 고쳤다. 퇴계가 서울에 살고 있었을 때, 이웃집 밤나무 가지가 울타리 너머로 뻗어서 가을이 되면 알밤이 선생 댁 마당으로 떨어졌다. 선생은 집 어린이들이 그것을 주워서 먹을까 걱정이 되어, 손수 주워서 이웃집으로 던졌다. 퇴계가 48세 때 단양 군수로 있다가 풍기 군수로 전근하게 되어 그곳을 떠날 때, 관인들이 아전들의 밭에서 수확한 삼다발을 걸머지고 왔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관례를 따라서 떠나는 수령에게 드리는 물건이라고 하였다. 퇴계는 호되게 관인을 꾸짖고 그것을 물리쳤다. 풍기 군수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도 서석 이외의 다른 짐은 없었다고 한다. 퇴계는 장남에게 보낸 편지에 “빈궁은 선비의 상사(常事)라 또 무엇을 개의하랴. 너의 아비는 평생 이로써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나…”라고 적어서 가난을 참고 견디어야 한다고 타이른 적이 있었다. 퇴계가 객지인 서울에 있었을 때 장남은 부친의 불편을 덜기 위하여 많은 일용품을 구해서 보내드렸다. 퇴계는 어떻게 해서 그 많은 물건을 구득했는지 의심스럽다며, 오히려 못마땅하다는 뜻을 전했다. 퇴계는 34세 되던 해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계에 발을 들여놓았고 여러 명예로운 직책에 오르기도 했으나, 부귀의 길은 그가 진정 원한 길이 아니었다. 그는 주위 사정에 밀려서 관직의 길을 걷기도 했으나. 그 길보다는 학문과 구도(求道)의 길이 자신을 위한 본연의 길임을 거듭 확인하였다. “부귀는 뜬 연기와 같고 명예는 나르는 파리와 같다”는 깨달음을 그는 평생 안고 살았다. 권세에 아부하는 따위는 퇴계에게는 있을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3-2. 김춘추(金春秋, 602∼661)



○ 성장과정


602년 진지왕의 손자로서 이찬(伊滄; 2등급) 용춘(龍春:龍樹)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眞平王의 딸 天明夫人 金氏이며 비는 文明夫人인데 각찬(角飡, 角干) 金舒玄의 딸, 즉 金庾信의 누이동생 文姬이다. 53세에 신라 29대 왕으로 즉위하였으며 武烈王이라고도 한다.


○ 관직생활

41세(642년)에 신라의 서방요충인 大耶城(지금의 합천)이 백제에게 함락되고 성주인 金品釋(사위)과 고타소(김품석의 부인, 김춘추의 딸)가 죽게 되어 김춘추계에 충격을 주었다. 46세에 구 귀족세력인 상대등 비담(毗曇)의 반란을 진압하고, 백제의 외곽세력인 일본의 실력을 살피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고, 47세(648년)에는 당나라에 파견되어 적극적인 친당정책을 추진하였다. 49세에 신라가 중고시대 전 기간을 통하여 계속 사용하여 오던 자주적인 연호를 버리고 당나라 연호인 영휘(永徽)를 신라의 연호로 채택하였다. 50세에 왕에 대한 正朝賀禮制를 실시하고, 품주(稟主)를 집사부(執事部)로 개편하였으며, 파진찬 金仁問을 당에 파견하여 숙위토록 하였다.

53세 되는 해(654년)에 진덕여왕이 죽자 진골 신분으로 군신들의 추대를 받아 제29대 왕으로 즉위하였고, 이듬해에 元子인 法敏을 태자에 책봉함으로써 왕권의 안정을 꾀하는 한편, 아들 文王을 이찬으로, 老且(혹은 老旦)를 해찬(海飡)으로, 仁泰를 각찬(角飡)으로, 그리고 智鏡과 愷元을 각각 이찬으로 관등을 올려줌으로써 자기의 권력기반을 강화하였다. 같은 해(655년)에 고구려가 백제·靺鞨과 연합하여 신라 북경지방의 33성을 공취하였다. 656년에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金仁問을 軍主에 임명하였고, 658년(57세)에는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문왕을 집사부 중시(中侍)에 새로이 임명하여 직계친족에 의한 지배체제를 구축하였으며, 58세에는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여 본격적인 백제 정벌에 착수하였다. 59세(660년)에는 김유신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여 왕권을 보다 專制化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본격적인 백제정벌을 추진하여 3월에 소정방을 비롯한 水陸 13만명이 백제를 공격하여 5월에 왕은 태자 법민과 유신, 眞珠, 天存 등과 더불어 친히 정병 5만 명을 이끌고 당군의 백제공격을 응원하였다. 7월에는 김유신이 황산벌전투에서 계백이 이끄는 5,000명의 백제군을 격파하고 당군과 연합하여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을 함락시켰다. 60세에는 고구려 장군 뇌음신(惱音信)이 말갈군과 연합하여 述川城(지금의 驪州)을 공격하고 다시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같은 해에 백제 부흥군을 격파하고, 이어 고구려 정벌의 군사를 일으켰다. 이 해에 사망하여 永敬寺 북쪽에 장사를 지냈다. 武烈은 시호이고, 太宗은 묘호(廟號)이다.


○ 평가: 경영능력이 뛰어난 인물


『삼국사기』에 의하면, 선덕여왕 11년(642)에 백제군의 공격으로 대야성이 함락되면서 성주 김품석과 그 부인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김춘추가 “기둥에 의지하고 서서 종일 눈도 깜빡이지 않고 사람이 눈앞으로 지나가도 깨닫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 하나 삼키지 못하랴”라고 탄식하면서 완전히 다른 인물로 돌변했다. 그는 왕족마저 백제의 공격으로 죽는 현실을 타개하지 않으면 신라의 미래는 없다고 판단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선결과제가 있었다. 새로운 국가 Agenda와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Leading Group의 형성이었다. 그래서 백제 멸망이라는 새로운 Agenda를 제시했다. 이를 성공시키기 위해 그가 주목한 인물이 바로 김유신이었고, 그에게는 목숨 걸고 따르는 가야계가 있었다. 이는 신라에 전혀 다른 성격의 지배집단이 형성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김춘추의 혈통적 정통성과 차별받던 가야계의 결합을 의미했다. 나아가, 고구려 군사지원 획득에 실패한 김춘추는 이에 실망하기는커녕 오히려 ‘백제 멸망'보다 더 큰 국가비전으로 ‘삼국통일’을 다시 제시했다. 이를 위해서는 신라 지배세력의 교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런 와중에 647년(선덕여왕 16년:진덕여왕 1년) 상대등 출신의 이찬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이 “여왕은 정사를 잘하지 못한다”는 남성우월적인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에는 서라벌 출신의 진골귀족들이 대거 가담했으므로 김춘추와 김유신이 절대적으로 불리했으나 그들은 자신들에게 역사적 정당성이 있다고 확신했다. 가야계가 주축인 관군은 비담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성공했고 김춘추와 김유신은 명실상부하게 신라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이는 신라 지배층 내부의 정치개혁을 성공시키는 초석이 되었다. 그러나 김춘추의 목적은 신라내부의 정치개혁이 아니었다. 내부의 정치개혁은 ‘삼국통일’이라는 새로운 국가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전제조건에 불과했다. 김춘추가 진덕여왕 1년(647), 바다 건너 倭國으로 향한 것은 ‘삼국통일’이라는 Agenda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김춘추는 왜국과 연합전선을 구축해 백제를 공격하기 위한 목적으로 현해탄을 건넜다. 『일본서기』‘효덕(孝德)천황조’는 “김춘추를 인질로 삼았다. 춘추는 용모가 아름답고 쾌활하게 담소했다”고 적고 있는데, 춘추는 중대형 황자 역시 친백제계라는 사실만 확인하고 소득 없이 돌아왔다. 그는 이듬해(648)에 다시 당나라로 향했는데 아들을 인질로 남기는 조건으로 군사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아들 文王까지 대동하는 비장함을 보였다. 고구려 침공 실패로 상처를 입은 당 태종의 마음을 움직여 군사지원을 약속받으면서, 그는 당 태종과 삼국통일 후 백제 영토와 대동강 이남을 신라가 갖기로 합의했다.


당나라와 연합전선 결성에 성공한 김춘추는 당나라의 문물을 대폭 수용해 신라의 체제를 바꾸었다. 진덕여왕 2년(648) 신라의 관복을 당나라의 것으로 바꾸었으며, 650년에는 개국 이래 사용하던 신라의 독자적 연호 대신 영휘(永徽)라는 당나라 연호를 사용했고, 651년에는 매년 정월 초하루 임금에게 하례하는 正朝賀禮制를 실시했으며, 품주(稟主)를 집사부(執事部)로 바꾸고 파진찬 竹旨를 집사 중시로 삼아 기밀 사무를 맡게 했다. 이는 당나라가 신라보다 앞선 사실을 인정하고 그에 맞추어 체제개편을 함으로써 당의 후원을 확실히 하는 동시에 내용적으로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김춘추는 이런 내정개혁을 진덕여왕의 왕권을 강화했지만 사실상 그 자신이 즉위했을 때에 대비한 체제 정비작업의 성격이 짙었다. 왕권강화라는 명분으로 자신의 실제 권력을 강화하는 실리를 획득한 것이다.


『삼국사기』 김유신조는 ‘진덕여왕이 죽고 후사가 없자 유신이 재상 알천과 의논해 춘추 이찬을 맞아 즉위케 했다’고 적고 있는데, 이는 군사권을 장악한 김유신의 실력으로 김춘추의 덕망을 명분삼아 임금으로 만들었음을 뜻한다. 그는 폐위당한 진지왕의 손자라는 점과 진골출신으로서 왕위에 올랐다는 약점이 있었다. 당초 군신들이 그 대신에 이찬 알천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던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신라에 진골은 많았다. 그가 사망하면 군신들은 그의 아들 대신에 다른 진골을 임금으로 추대할지도 몰랐으므로 그는 구세력과 타협했다. 재위 2년 정월 이찬 금강(金剛)을 상대등으로 삼는 대신 그의 장자 법민(문무왕)을 태자로 책봉하고 둘째 아들 文王을 이찬, 老且를 해찬으로 삼아 태자를 보좌하게 했다. 그리고 재위 7년(660) 정월 상대등 금강(金剛)이 사망하자 김유신을 그 자리에 임명함으로써 오랫동안 꿈꾸던 국왕 김춘추-상대등 김유신 체제를 구축했다. 이런 과정들은 ‘삼국통일’이라는 Agenda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내부 체제 정비를 끝낸 이듬해인 재위 8년 3월 신라는 드디어 백제 정벌에 나섰다. 비록 김춘추는 백제 멸망 이듬해인 661년, 재위 8년 만에 사망했으나 생전에 김춘추로부터 확실한 경영 수업을 받은 후사 문무왕은 고구려까지 멸망시켜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삼국사기』‘경순왕조’는 태종무열왕(김춘추)부터 혜공왕까지 8명의 왕을 중대(中代)라 한다며 그 계통을 달리 기술하고 있는데, 김춘추의 후손들은 진골이면서도 신라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전제왕권을 구축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신라는 그의 사후 당나라와 마찰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최고의 헌사인 태종이란 시호를 올렸던 것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우리 역사의 강역을 축소시킨 것으로 비난받았지만 신라의 자리에서 볼 때는 두 강대국과 싸워 이룩한 빛나는 성취였다. 백제는 의자왕의 정치개혁 실패로, 고구려는 연개소문 사후 내부 분열로 어지러울 때 신라는 삼국통일이라는 새로운 국가 Agenda를 제시하고, 이를 실현할 새로운 Leading Group을 형성했으며 이 새로운 비전에 국민 다수의 동의와 참여를 실현시켜 불가능해 보이는 과업을 완성하였던 것이다.





3-3. 허준(許浚, 1539년~1615년)


○ 성장과정

훈련원정(訓鍊院正) 허곤(許琨)의 손자이고, 용천 부사를 지낸 허론의 서자로 1539년(중종34년) 경기도 양천현 파릉리 능곡동 백석마을(현 강서구 등촌2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경전과 역사에 밝고, 특히 의학에 뛰어나 전라도 지역의 심약(審藥·궁중에 바치는 약재를 검사하기 위해 지역에 파견했던 종9품 벼슬)직을 수행하는 한편, 의학 공부에 전념하며 지역사회의 의원 역할을 하였다. 권세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었지만 서자 출신이었기 때문에 문과로 진출 할 수 없어서 잡과의 하나인 의과를 택해 의관으로 한 평생 활동하였다.

30세(1568년) 서울에 입성해 조선 중기의 학자 유희춘을 찾았다. 유희춘의 '미암일기'에 의하면, 허준이 '노자', '조화론' 등의 책을 유희춘에게 선물하고, 그의 가족과 친구들의 질병도 돌보았다고 한다. 허준이 의술에 뛰어남을 알고 있던 유희춘이 1569년(선조 2년)에 허준을 조선시대 궁궐 안에 있는 의원에 천거하는 편지를 이조판서에게 보냈다. 그래서 허준은 33세 때, 관직인 내의원 첨정(내의원의 고위 행정직 제2위의 자리로 지금의 보건복지부의 과장급 이상에 해당)에 이르게 되었다.


○ 직업 활동

31세가 되는 해(1569년)에 유희춘이 이조판서 홍담(洪曇)에게 허준의 내의원직(內醫院職) 천거를 부탁하면서 허준의 첫번째 내의원 출사가 시작되었다. 이듬 해 8월, 어의 양예수와 허준이 유희춘을 방문하였고, 33세에 종4품 내의첨정(內醫僉正)이 되고, 35세에 정3품 내의정(內醫正)이 되었으며, 37세에 내의원(內醫院: 왕을 비롯한 궁중의 왕족과 대신의 치료를 담당하던 국가 최고 의료 기관)에서 근무하기 시작하였고, 어의 안광익과 선조를 진맥하였다.

1581년(43세) 왕명에 의해 한의학의 기초가 되는 “맥경”(脈經)을 직접 교정·출간하였고, 중국의 의학서 <찬도맥결>을 알기 쉽게 다시 고쳐 쓴 <찬도방론맥결집성>이라는 책을 교정하였다.

52세에는 당시 왕자(후일 광해군)를 치료한 공으로 당상관의 가자(加資·정3품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를 명(命) 받았다. 54세(1592년)에는 임진왜란을 맞아 의주까지 선조의 피난길을 끝까지 수행하였다. 58세에는 유의 정작, 어의 양예수, 이명원, 김응탁, 정예남 등과 함께 선조임금의 명을 받아 내의원 의원들과 함께 새로운 의학서 <의방신서>를 편찬하기 시작하였다.

62세(선조33년) 때 스승이자 당시 최고의 명의였던 양예수가 사망하였고, 허준이 首醫가 되었다. 1601년(63세)에는 세조 때의‘구급방’을 번역한 ‘언해두창방’과 임원준의 ‘창진집’을 번역·개편한 ‘언해태산집요’를 편찬하였다. 68세에는 선조의 병을 회복시킨 공로로 정1품 보국숭록대부가 될 수 있었으나 사간원과 사헌부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였고, 수의였던 허준은 1608년(70세)에 선조가 병사하였기 때문에 의주로 유배되면서, ‘동의보감’을 본격적으로 쓰게 되었다.

1609년(71세, 광해군 1년) 유배에서 돌아왔고, 이듬 해(1610년, 72세) 15년간 연구해 오던 의서를 완성하자니, 광해군은 감격하여 “동양의학의 보물이요 거울이라”는 뜻을 담아 ‘동의보감(東醫寶鑑)’이라는 책명을 하사하여, ‘동의보감’ 25권을 완성되었다. 1613년(75세)에는 동의보감이 훈련도감본 목활자로 발간되었고, ‘新纂癖瘟方’(신찬벽온방)‘과 ‘癖疫神方’(벽역신방)을 편찬(이 두 책은 전염병 전문 의서로서, 매우 예리한 관찰을 토대로 편찬한탁월한 과학적 의서)하였다. 77세(1615년)에 사망하였으며, 그 후 광해군은 그에게 정1품 보국숭록대부를 추증하였다.


○ 평가: 조선 의학사에서 독보적인 인물


- 한의학과 궁궐 의술 뿐 아니라 민간 의술과 한의학 교육에도 공헌

"동의보감"을 비롯하여 7가지의 한의학서를 쓰고 한의술을 편 허준은 조선시대의 모범적인 한의학자이자 명의로서 후대의 많은 조선 의학자들은 허준의 의학서로 공부하였다. 또 그가 정리한 "찬도방론맥결집성"은 이후 조선시대 내내 의과 시험의 교재로 활용되어 의학 초보자 학습의 길잡이 역할을 하였다. "동의보감"이 고급 의학으로서 높은 수준의 의학서라면, 한글로 쓴 "언해구급방", "언해태산집요" 등은 민간에서 가장 시급하고 요긴한 기본 의학 지식을 제공 하는 원천으로서 낮은 수준에서 의학을 손쉽게 배우고 의료를 널리 확산시키게 한 대중의학서라 하겠다. "동의보감"으로 허준은 조선의학계의 으뜸이 되었으나 그의 학문이 의원들에게 고급 지식을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의 가치가 더욱 빛난다. 허준은 아기를 낳거나 산모를 관리하는 일, 의원이 없거나 의원을 부를 틈이 없을 때 벌어지는 온갖 응급상황에 대한 처치, 응급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가정상비약의 마련 등 전문적인 의학지식을 갖추지 못한 일반 백성들을 위한 지침을 한글로 저술하여 널리 보급하였다. 또한, 의학을 처음 배우는 생도들이 의학의 핵심인 진맥을 제대로 배울 수 있도록 올바른 진맥 교범을 낸 것도 그의 업적이다. 그는 조선사회에 만연했던 천연두, 성홍열, 티푸스 등의 전염병을 이겨내려는 의학적 노력의 중심에 있었다. 특히 천연두의 경우에는 민간의 강한 금기에 도전하는 불굴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허준은 왕명을 받아 1581년에 첫 책인 "찬도방론맥결집성"의 교정을 완수하였다. 이 책은 조선초기부터 진맥학 학습의 기본 교재로 활용되어 온 것인데, 잘못된 점이 많아서 선조가 교정 작업을 명한 것이었다. 당시 천연두 병에 걸린 왕자(이후 광해군)에 대해 "약을 써서는 안 된다."는 미신이 강하게 퍼져 있어서 어의 중 그 누구도 왕자의 질병을 고치겠다고 나서지 않았으나, 허준이 나서서 병을 고쳤다. 그리하여 정3품 당상관 벼슬을 얻게 되었는데, 그 후에도 다른 왕자와 공주 그리고 민간의 천연두 병을 많이 고쳐서 "천연두 병의 명의"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다른 신하들과 관리들은 핑계를 대며 왕을 보호하지 않았지만 허준은 의주까지의 피난길을 끝까지 함께 하며 선조의 건강을 보살핀 공으로 종1품 숭록대부가 되었는데, 의관으로서 종1품에 오른 것은 유래가 없는 일이었다. 그 후 또한 왕의 병세를 회복시킨 공으로 허준에게 정1품 보국숭록대부를 내리려 했으나 "신분 질서를 문란케 하는 일"이라며 사헌부와 사간원이 격렬하게 반대하자, 선조는 어쩔 수없이 취소하였다.

총책임자로서 허준은 1596년에 유의 정작, 어의 양예수, 이명원, 김응탁, 정예남 등과 함께 "동의보감" 책의 편집을 시작하였다. 1607년에 선조가 병으로 죽자 당시의 수의였던 허준은 그로 인해 의주로 유배당하였는데, 수의로 일하느라 절반도 쓰지 못했던 "동의보감"을 유배당한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쓰게 되었다. 선조가 죽은 후 왕이 된 광해군이 허준을 귀양살이에서 풀어주었다. 1610년(광해군 2년) 72세 되던 해, 드디어 허준은 "동의보감" 25권을 완성하여 광해군에게 바쳤다. 허준은 "동쪽 지방의 의학 전통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이라는 뜻"의 동의(東醫)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75세 때, 방대한 분량 때문에 우여곡절을 겪던 "동의보감"이 훈련도감본 목활자로 발간되었다.

이 해(1613년)에 크게 유행한 온병에 대비하기 위해 허준은 "신찬벽온방"을 지었고, 당독역(성홍열)의 유행에 대비하기 위해 "벽역신방"을 편찬하였는데, 이 책에서 보인 허준의 성홍열 관찰은 세계질병사상 가장 이르면서도 정확한 기록 중 하나로 평가된다.


- 동아시아 의학사에 크게 기여

"동의보감"은 출간이후 현재까지 중국에서 대략 30여 차례 출간되었고, 일본에서도 두 차례 출간되었다. 특히 중국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려서 중국 의서 가운데에서도 "동의보감"과 성격이 비슷한 종합의서로서 이 보다 많이 출판한 책은 불과 몇 종에 불과하다. 이것은 두 갈래로 흩어져 내려온 양생의 전통과 의학의 전통을 높은 수준에서 종합하였다. 병의 치료와 예방, 건강도모를 같은 수준에서 헤아릴 수 있게 한 것이다. 또한 병의 증상, 진단, 예후, 예방법 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냈다. 중국 의학 책 중에서 이 만큼 이런 내용이 잘 갖춰진 책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는데 가장 놀라운 것은 한의학 전통의 핵심을 매우 잘 잡아냈다는 점이다. 허준은 방대한 한의학 전통에서 2천여 가지의 증상, 7백종 남짓의 약물, 4천여 가지의 처방, 수 백 가지의 양생법과 침구법을 제시했다. 또한, 허준은 자신의 뛰어난 편집 방식과 임상 경험으로 그것을 엮어내어 자신의 "동의보감"을 동아시아 의학사에서 주목받는 책 가운데 하나로 만들었다.


- 의술을 학문경지로 끌어올리다

허준은 유교·도교·불교의 자연관을 수용해 당시 의술의 수준을 넘어 의학철학으로 끌어올렸다. “동의보감”의 첫 장은 ‘신형장부도’라는 인체의 장기와 그 특징을 그린 인체도로 시작한다. 옛 신선과도 같은 단순한 모습의 이 그림은 사실 간단치 않은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동양의 전통적 자연관인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의 세 가지 요소를 인간의 몸 속에 상징화한 도형이다. 옆으로 그려진 인체의 상반신 그림에는 하늘을 상징하는 머리, 땅을 상징하는 몸 그리고 머리와 몸을 연결하는 인체의 가장 중요한 부위인 척추가 있다. 이는 하늘과 땅이 지닌 선천의 기운과 인체 안의 후천 기운이 인체 내부(척추의 길)를 통해 순환하는 자연의 원리를 보여준다. 대우주와 소우주가 합일하는 지점이 바로 인체라는 설명이다. 바로 이 “동의보감” 서두를 장식한 ‘인간론’은 허준이 의학을 단순히 질병 치료의 기술로 여기지 않고 철학의 수준으로까지 고양시켰음을 알게 한다. 이러한 경지는 물론 허준이 유학과 도가(道家)에 충분한 소양을 갖췄기 때문이다. 당시 중인 신분의 직업인이었던 의원이 이처럼 높은 학문 수준을 갖추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의술을 철학 수준으로 고양시킨 것은 동양의학 수준을 한 단계 높인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허준을 더욱 높이 평가할 수 있는 점은 그가 주체성 있는 학문으로 정착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 사람에게는 그들의 땅에서 나는 약초들이 효험이 있듯, 우리 몸에는 우리 땅에서 자라나는 약초가 적합하다”는 身土不二 이론을 펴 우리의 몸에 맞는 의학을 연 것이다. 그의 대표적 저서 東醫寶鑑 이외에도『纂圖方論脈訣集成』(찬도방론맥결집성/1581년 왕명에 의해 고양생(高陽生)의 『찬도맥결(纂圖脈訣)』을 4권 4책으로 교정하여 편찬한 맥법 진단의 원리를 밝힌 책), 1601년 盧重禮의 『태산요록(胎産要錄)』을 다시 편찬한 후 이를 언해한『諺解胎産集要』및『諺解痘瘡集要』,『諺解救急方』(언해구급방/세조때 편찬된 『구급방(救急方)』에 주석을 달아 해석한 책), 그리고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을 치료하기 위해 편찬한『新纂癖瘟方(신찬벽온방)』,『癖疫神方(벽역신방)』등이 있다. 癖疫神方은 1612년(광해군 4년) 가을부터 유행하여 사망자가 많이 생겼던 전염병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이듬해 다시 당독역이 유행하여 또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였기 때문에 허준이 지은 것이다. 이 당독역은 의서에 병명이나 치료법이 없던 혹독한 질병으로 악성의 질병이었기 때문에 당자가 붙었다. 허준은 병의 증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 치료법을 제시하였는데, 탁월한 안목으로 당시 의서에서 없던 이 질병의 증상으로 두통 신동 오한 고열 후의 얼굴과 몸에 붉은 색의 발진이 생기고 정신이 혼미해져 헛소리를 하며, 앓고 난 후에는 머리가 모두 빠지고 열독으로 피부가 말라 벗겨진다고 하였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오늘날의 성홍열의 증상을 그대로 기술한 것 셈이다. 따라서 두진이나 마진과 혼동하기 쉬운 이 병에 대해 1613년 이렇게 정확히 병증과 요법을 기술한 것은 이 책이 세계 최초의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세계병리학사상 허준의 업적은 크게 평가받아야 하며 이 책을 통해 조선의 의학, 특히 전염병학은 세계적 수준으로 발돋음 할 수 있었다. 허준의 이러한 의학지식과 탁월한 견해는 『동의보감』을 편술한 후 더욱 완숙해져 『벽역신방』과 같은 매우 탁월한 과학적 의서를 세상에 내 놓을 수 있었다.


○ 관련기록

허준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는 문헌으로는 18세기에 저술된 李希齡의 ≪樂坡漫錄≫과 19세기에 저술된 劉在健의 ≪里鄕見聞錄≫을 들 수 있다. ≪악파만록≫에 의하면, 허준이 명의로 이름을 얻기 전 약을 찾으려고 사신 일행과 함께 중국의 무려산에 도착했는데, 길가에 한 무리의 코끼리 떼가 있다가 한 놈이 허준의 말 앞으로 나와 가로막으며 옷을 끌었다. 그가 말에서 내리니 코끼리가 엎드려 절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함께 가자는 듯하므로 그가 응낙하자 그를 태우고 깊은 산 속의 굴로 달려갔다. 굴 안에 세 마리의 코끼리 새끼들이 피를 흘리고 누워 있으므로 허준이 약을 내어 치료했다. 새끼들이 낫자 어미가 다시 그를 태워 옥하관에 내려놓고 가 다시 사신들과 합류하게 되었다. 일의 자초지종을 듣고 난 일행이 모두 경탄하였고 이로 인해 허준은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후일 내의에 오르게 되고 임란 때 호성공신으로 양평군에 봉해졌다.

이에 비해 ≪이향견문록≫에 실린 허준 관계 기록은 간단한 사실만을 전하고 있어 설화로 보기 어렵다. ≪이향견문록≫에 비해 ≪악파만록≫의 각 편이 풍부한 서사적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은 허준에 관한 설화들이 허준 당대 또는 그의 사후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전해지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하게 한다. 구전되고 있는 설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허준이 젊어서 이인을 만나 의술을 배웠다. 10년을 약조하고 공부를 하던 중 스승이 없는 사이 함부로 과부 아들의 병을 고쳐주었다가 8년 만에 쫓겨났다. 그 뒤 의술로 명성을 쌓아 중국 천자 딸의 병을 고쳐 달라고 초빙되어 가는 길에, 호랑이 입에서 비녀를 꺼내주고 절구와 쇠, 더러운 베를 얻었으나 베가 죽은 이를 살리는 회혼포(廻魂布)인 줄 몰라보고 버렸다. 그는 환자의 병을 사맥(蛇脈)으로 진단했으나 고칠 방도를 몰라 말미를 얻어 고민하던 중 어떤 이인이 나타나 그것이 용맥이며 절구와 쇠로 고칠 수 있음을 알려주어 치료해 주었다. 귀국한 후 다시 중국으로 불려가 큰 구렁이로 변한 천자 딸을 고쳐 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역시 방도를 몰라 죽을 고민을 하고 있는데 스승이 나타나 처방을 알려주어 원래의 몸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큰 명성을 얻고 높은 벼슬을 받은 뒤 귀국하였다. 구전설화에서는 각 편에 따라 약간의 변화가 있으나 의술을 배우는 과정에서 불완전성이 암시되고(10년 수학 기간을 다 채우지 못함), 중국행의 동기가 천자의 가족(딸 또는 부인)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며, 그들의 증상이 용종잉태 또는 뱀으로 변해 있는 등 뱀과 연관되어 있으며, 이인의 도움으로 치료 방도를 얻고 명성을 얻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구전과 문헌 소재 자료의 유사점은 그가 명의로서 자리를 굳히게 되는 계기가 중국행이라는 점, 특히 특정 동물을 치료해 준 것이 명성을 얻게 된 계기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구전설화에 비해 문헌설화의 내용은 소략한 편인데, 이 같은 문헌 소재 설화와 구전설화 사이의 공백을 메꿔줄 수 있는 자료로서 허준의 스승인 양예수(楊禮壽)에 관한 문헌설화를 들 수 있다. 문헌소재 양예수 설화 중 구전되는 허준 설화와 상통하는 부분으로는 ≪이향견문록≫의 경우 양예수가 사신을 따라 중국에 갔을 때 범의 새끼를 고쳐 주고 주천석(酒泉石)을 선물로 받았다는 부분, 유만주(兪晩柱)의 〈흠영 欽英〉에서는 그가 치료했던 재상집 딸 병의 원인이 지렁이에게 감통하여 잉태했기 때문이었다는 부분 등을 지적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을 감안하면, 구전설화에서 나타나는 허준이 중국에 간 이유, 범을 고쳐주고 받은 보배, 환자와 이물(異物)과의 관계 등은 허준과 그의 스승 양예수의 일화들이 민간에 구전되는 과정에서 모든 내용들이 양예수보다 유명했던 허준의 일화들로 결집되어 전승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설화 통합은 사제 관계였던 허준과 양예수의 의술적 계승관계를 바라보는 민간적 시선을 함축하는 것으로 보인다. 구전되고 있는 수많은 명의 관계 설화 중에서 허준의 경우에만 중국행이 나타난다는 사실도 그의 의술 체계에 대한 민간적 이해 방향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 왕진가던 길에 신이한 의료기를 획득했고, 그것이 그의 의술 발전에 결정적인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점은 민간에서 이해하고 있는 허준의 의술과 사상적 배경의 내용에 대해 시사하는 바 크다. 그는 향약을 집성하여 우리 나름의 의학 체계를 수립한 인물이다. 중국행과 관련된 이야기 내용들은 그가 중국의 의술을 정리하여 한국적 처방을 확립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3-4. 장영실(蔣英實, ?~?)


○ 성장과정


장영실(將英實)은 경상도 동래현 관기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정확히 모르며, 손재주가 뛰어났던 그는 어린 나이에 관기였던 어머니 대신 동래현의 노비가 되는데, 그 때문인지 정확한 출생일시도 알 수가 없다.

「세종장헌대왕실록」권 61에는 『영의정 黃喜와 좌의정 孟思誠에게 의논하기를, "행사직(行司直) 장영실은 그 아비가 본디 元나라 소항주(蘇杭州)사람이고, 어미는 기생이었는데, 공교(工巧)한 솜씨가 보통 사람에 비해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보호하시었고, 나도 역시 이를 아낀다. 임인·계묘년 무렵에 尙衣院 別坐를 시키고자 하여 이조판서 허조와 병조판서 조말생에게 의논하였더니, 허조는 '기생의 소생을 상의원에 임용할 수 없다.'고 하고, 조말생은 '이런 무리는 상의원에 더욱 적합하다.'고 하여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지 아니하므로 내가 굳이 하지 못하였다가 그 뒤에 다시 대신들에게 의논한 즉, 유정현 등이 '상의원에 임명할 수 있다.'하여 내가 별좌에 임명하였다. 장영실의 사람됨이 비단 공교한 솜씨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똑똑하기가 보통에 뛰어나서 매양 강무할 때에는 나의 곁에 가까이 모시어서 내시를 대신하여 명령을 전하기도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산 장씨 종친회에 의하면, 시조는 고려 중엽에 중국에서 건너와 아산에서 영지를 하사 받고 살게 되었으며 후손들이 점차 관직에 오르고 8세에는 5형제 모두가 차례로 정경에 해당하는 전서에까지 오르게 된다. 그 시기는 고려 말이었으며 조선으로 나라가 바뀌자 모두 산골로 피신하였다. 장영실의 부는 장성휘이며 5형제 중 3째인데, 고려 충신인 5형제 중 성길(비안), 성발(의성), 성미(부안), 성우(고로)는 지방으로 피신하여 화를 면한 것으로 보이나, 성휘는 개성에서 역적으로 몰리고 처자(장영실의 모)는 관노로 된 것이라고 추리하고 있다. 그러나 족보의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당시에 시조님의 유품과 족보를 다 잃어버리고 후에 다시 기록을 모아 족보를 재작성하였기 때문에 족보에 기록된 내용 중 임진왜란 이전의 기록은 역사적 사실로 공인 받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장영실에 관한 기록은 世宗實錄과 練藜室記述 등에서 나타나지만 그의 생년과 사망시기를 알 수 없다. 여러 가지 업적은 알 수 있지만, 출생에 관해서는 동래현의 관노(官奴)였으며 기생의 소생이었다는 사실 뿐이다. 당시로서는 가장 천한 계급의 출신이기에 그의 출생과 성장에 관한 기록은 전무한 실정이다. 장영실의 출신에 관해서는 중국 사신과 기생 사이의 자식으로 관노로 출생하였다는 설, 오랑케 출신으로 잡혀와서 모자가 관노로 되었다는 설, 아산 장씨 출신의 양반과 기생 사이의 사생아라는 설, 아산 장씨 족보기록과 시대적 상황에 근거한 운영자의 추리 등 여러 가지로 추정된다. 장영실은 1423년(세종5년)에 상의원 별좌로 관직을 갖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때 그의 나이를 40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참고자료 : http://210.100.249.2/동래문화/2.htm) 이에 따르면 그가 태어난 시기는 1383년경이 된다. 아산 장씨 5형제는 이 시기에 고향을 떠나 깊숙한 산속으로 흩어졌다. 그 중 4분은 자손을 남겨 아산 장씨 씨족을 번창시켰다. 그러나 장영실의 부친(성휘)는 고려 관직기록은 있으나 사망기록이 없다. 이를 미루어 아산 장씨 5형제는 조선건국에 반대하던 세력에 가담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장영실을 훌륭하게 키워낸 장영실의 어머니를 일반적인 천민 출신의 관노나 기생으로 보는 것은 불합리하다. 적어도 젊은 시절은 고관의 부인으로서 학식을 갖춘 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린 아들을 위하여 관노로서의 모든 수모를 참고 견디어 낸 것으로 보아야 하며 나름대로 아들을 훌륭하게 키웠다고 본다. 이상의 설명을 종합해 본다면 아산 장씨 족보의 기록처럼 장영실은 아산 장씨 9세손으로서 장성휘의 아들이며, 유아기에는 훌륭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조선개국이라는 시대적 환경으로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추리이다. 장영실은 어머니의 교육 그리고 본인의 재능과 의지로 인생을 개척한 입지전적인 위인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상 열거된 다른 설들은 모두 아무런 근거 없는 단순한 추정에 불과한 것이다. 장영실의 어린시절은 아직 조선시대의 양반제도가 정착되기 전이라는 사실도 참고해야 한다. 조선 개국 후에는 국가적인 화합차원에서 고려출신 인재도 관직으로 등용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특히 정몽주와 같은 역적의 자손들도 고위관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아산 장씨 선조들도 이후 산골에서 나와 많은 사람들이 관직으로 진출하기도 하였으며 일부는 초야에서 학문을 닦으며 후진양성만 하신 분들도 있다.

장영실은 어릴 적부터 아주 치밀한 두뇌의 소유자라고 전해진다. 사물에 대한 관찰력도 뛰어났으며, 기계의 원리 파악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고, 기계 등을 만들고 고치는 일에 능통했으며, 무기나 농기구를 제작하고 수리하는 등 금속을 다루는 일에 능숙했다고 한다. 장영실은 비록 관노 출신이었으나 탁월한 재능을 어려서부터 발휘하여 주위로부터 인정받았고, 한양의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되어 太宗 때 발탁되어 궁중에서 일하게 되었다. 장영실이 관직에 오르게 된 것은 세종 때였다. 엄격한 신분제가 행해지던 당시에 노비출신인 자를 궁중에 두어 관리로 중용케 한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었기에 모든 문무(文武) 대신들의 반대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장영실과 같은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대신들을 설득하여 결국 장영실을 채용하였다.




○ 직업활동

1423년(세종5) 세종의 특명으로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나 궁중의 기술자인 상의원 별좌(임금의 의복을 만들고 대궐안의 재물과 보물을 관리하는 정5품 벼슬)에 임명되었다. 1432년 세종은 경연자리에서 예문관 제학 鄭麟趾에게 대제학 鄭招와 협력하여 고전을 연구하여 천문기구들을 만들고, 특히 간의(簡儀)를 만들어 北極出地(緯度)를 측량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정인지와 정초는 자료조사를 담당하고, 중추원사 이천과 호군(護軍) 장영실은 실제 제작과정을 감독하여 우선 나무로 만든 간의(木簡議)를 완성하였다. 1433년 장영실은 천문을 관측하는 혼천의를 만들기 시작하였고, 1435년에는 금속 활자인 갑인자 만드는 일을 지휘·감독하였다. 1437년에는 만들기 시작한 지 5년 만에 별의 움직임을 관측하는 간의를 완성하였다. 1438년에는 이순지 등과 함께 자격루와 같은 물시계인 옥루를 만들었고, 경상도 채방별감이 되어 구리와 철을 캐내고 제련하는 일을 감독하였다. 1441년에는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를 만들었고, 물의 높낮이를 나타내는 수표를 발명하여 하천의 범람을 미리 알 수 있도록 함으로써 홍수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고 그 공으로 장영실은 상호군에 올랐다. 1442년에는 장영실의 감독하에 만든 왕의 가마가 종묘 행차 도중에 부러지는 사고가 생겨 의금부의 국문을 받고 불경죄로 벼슬에서 쫓겨났다.

관노로 있으면서 1400년 영남지방에 가뭄이 들자 강물을 끌어들여 가뭄을 이겨내게 한 장영실은 그 공로로 동래 현감으로부터 상을 받고 그 후 세종이 전국에 인재를 모으자 동래 현감의 추천을 받아 입궐하게 된다. 대궐에서 그가 처음 일했던 곳은 활자를 만드는 주자소(鑄字所)였다. 이곳에서 장영실은 세종의 인정을 받아 1423년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나 상의원 별좌(태조(太祖) 때 세워진 관서)라는 벼슬에 오르게 된다. 장영실을 상위원 별좌로 발탁한 세종은 그를 항시 가까이 두었는데 이는 세종의 총애가 얼마나 컸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세종 14년( 1432년)에 대대적인 천문·기상의기 제작사업이 세종의 명에 의해 시작되었다. 장영실은 당시 중추원사(中樞院使)였던 이천을 도와 간의대 제작에 착수하는 한편 여러 가지 천문의기 제작을 감독하였다. 그로부터 1년이 채 안되어 장영실은 그 능력을 인정받아 5품이던 상의원 별좌에서 4품인 호군(護軍: 조선시대 5위의 정 4품 무관)에 오르는 영예를 안기에 이르렀다. 이해에 혼천의(渾天儀) 제작에 착수하여 이듬해인 1434년에 완성하였는데 혼천의는 선기옥형(璇璣玉衡) 또는 혼의(渾儀)라고도 불리는 일종의 측각기로 적도좌표를 관측하고, 천체의 위치를 측정하는데 쓰였던 의기였다. 혼천의는 관측용과 실내용으로 구분되는데, 「세종실록」에 의하면 이때 장영실이 만들었던 것은 실내용으로 보인다. 이 혼천의는 세종 14년(1432)에 시작된 여러 천문의기 제작사업 중에서 가장 먼저 완성을 본 의기(儀器)였으며 간의(簡儀: 기능이 많아지고, 구조가 복잡해 진 혼천의에서 적도환, 백각환, 사유환의 세 고리만을 떼어 간략히 만들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 등 다른 많은 의기들의 모태가 된 기구이다. 이 혼천의 제작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세종은 혼천의의 완성을 위하여 세종 3년(1421)에 장영실과 윤사웅을 명(明)에 파견하였고, 세종 13년(1431)에는 수학자를 명에 파견하여 그 기술을 습득해 오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천문학적 지식이나 기술은 다른 어떤 분야의 무엇보다도 중요한 분야였던 까닭에 이들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장영실을 비롯한 일행은 기기들의 목적과 성능 그리고 구조만을 보고 온 후 자신들의 기술을 총 동원하여 만들었다. 그러므로 이 혼천의는 중국의 기술적 영향과 우리 고유의 과학적 전통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기기라고 할 수 있다.




○ 평가: 조선 최고의 과학자


- 대대적인 천문·기상의기 제작


장영실이 처음 만들었던 과학기기는 천문 관측기구인 간의(簡儀)인데 이 간의로 잰 당시의 한양이 북위 38도 부근으로 밝혀져 정확한 측정기술을 자랑하고 있다. 장영실은 이어 이천, 정철 등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1433년 간의를 더욱 발전시킨 혼천의(渾天儀)를 완성시킨다. 그 공으로 정4품인 호군벼슬로 승진한 뒤 자동 물시계를 연구하기 위해 명나라로 유학을 다녀온 후, 1434년 정교한 자동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를 완성시켰다. 자격루는 물시계에다 정밀한 기계장치를 결합, 때가 되면 인형과 징북종을 이용, 시각과 청각을 통해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장치로 장영실이 아니면 만들 수 없을 정도로 정밀한 시계였다. 자격루가 망가졌어도 그가 죽은 후 고칠 만한 사람이 없어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다가 100년 후인 1534년에야 복원됐다는 사실이 그 정밀성을 입증해 준다. 장영실이 만들었던 또 다른 걸작은 해시계인 앙부일구와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 천평일구, 정남일구, 일성정시의 시간과 계절을 알 수 있고 천체의 움직임도 관측할 수 있는 옥루(玉漏)등을 꼽을 수 있다. 장영실은 1442년 세계최초로 측우기를 만들어냈다. 서양에서 카스텔리가 1639년 만든 측우기보다 2백년이나 앞서 만들어졌던 이 측우기는 강우량을 정확히 측정하기 위해 측우기의 크기, 빗방울이 떨어질 때 생기는 오차까지 고려해 만든 과학적인 것으로 현재 WMO(세계기상기구)가 정한 측정오차에도 합격할 만큼 뛰어난 업적이었다.


- 15세기 최고의 기계 기술자


장영실은 기념사업회의 명칭에서 보듯이 '과학선현'의 한 사람이다. 13세기 아랍 최고의 기술자인 알재재리 연구의 세계적 대가인 영국의 도날드 힐(Donald Hill) 박사는 “13세기를 대표하는 기술자가 알재재리라면 장영실은 15세기를 대표하는 기술자”라고 평가한바 있다. 힐에 따르면 “중세의 기계 기술자란 복잡한 기계를 설계하고 제작하여 의도했던 대로 기능을 발휘하게 했던 사람”이라고 한다. <세종실록> 65권 보루각기 가운데 “모든 기계(機械)는 감추어져 보이지 않고...”라는 귀절과 “영실은 ... 성질이 정교하여 항상 궐내의 공장(工匠) 일을 주관하였다.”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왕실 최고의 기계공장(機械工匠)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자격루(自擊漏)


기록에 의하면 장영실은 모두 3종류의 물시계를 만든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 첫 번째 것은 세종 6년인 1424년에 만든 것인데 「세종실록」에 의하면 "중국의 제도를 참고하여 구리로서 경점(更占)의 기(氣)를 부어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자동시계가 아닌 단순하게 물방울이 떨어지는 양을 측정하여 시간에 따른 부피 증가로 시간을 알 수 있는 장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 10년 후인 1434년에 만든 것이 두 번째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이다. 이것은 자동시보 장치가 붙어 스스로 움직이는 물시계이다. 즉, 경루(更漏)와 같이 눈금으로 시간을 알 수 있는 물시계에 시, 경, 점에 따라 종, 징, 북이 울리고, 인형이 나타나 몇 시인지 알려주는 것으로 경복궁 남쪽의 보루각(報漏閣)에 설치되었던 시계이다. 그 구성은 4개의 파수호(播水壺), 2개의 수수호(受水壺), 12개의 살대, 동력전달장치 및 시보장치로 구성되어 있다. 파수호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수수호로 들어가서 살대를 들어올린다. 이것은 처음 만든 경루와 같은 원리이다. 살대가 떠오름에 따라 이 부력이 쇠구슬과 지렛대에 전달되어 구슬이 떨어지면서 시각 알리는 장치를 움직이게 한다. 즉, 파수호보다 높은 곳에는 목인(木人/시각을 알리는 사람이 잘못 알리게 되면 중벌을 면치 못함을 염려하여 세종이 장영실에게 명하여 시각을 알리는 일을 맡길 時報인형을 나무로 만들었음) 3명이 있어서 하나는 시각을 알리기 위하여 종을 치는 일을 맡으며, 다른 하나는 경을 알리기 위하여 북을 치는 일을 맡고, 나머지 하나는 점을 알리기 위하여 징을 치는 일을 맡는다. 목인 보다 낮은 곳에 평륜(平輪)이 있어서 그 둘레에 十二支神을 배치해 놓았다. 이들 신은 각각 한 시각씩 열두 시를 담당하였다. 만약 子時가 되면 자시를 맡은 신이 자시의 시패를 들고 솟아올라왔다가 내려간다. 이처럼 자격루는 종·북·징의 소리와 12지신의 동작을 통해서 각각 시각을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문화재관리청이 2004년부터 11억원을 지원하면서 건국대 산학협력단에 복원을 의뢰해 완성하였다고 ‘07.11.21 공개한 자격루는 1434년 만든 물시계이다. 장영실이 만든 자격루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현재 덕수궁에 남아있는 자격루의 일부분(국보제229호)은 중종31년(1536년) 창경궁에 설치되었다가 경복궁으로 옮겨진 것으로 1895년까지 표준시계로 사용되었으며, 한일합방이후 1911-1912년경 창경궁으로 이전되었다가 1938년에 다시 덕수궁으로 옮겨진 것이다. 복원한 자격루는 물을 저장하고 흘려보내는 3개의 대·중·소 파수호(播水壺)와 물을 받아 수위를 조절하는 수수호(受水壺), 12시마다 종을 울리는 장치인 시기(時機), 1경(오후 7시 무렵)이후 5경(오전 3시 무렵)까지 북과 징을 울리도록하는 장치인 경점시보기구 등으로 이루어졌다. 일렬로 놓인 3개의 파수호를 통과한 물이 수수호에 모이면 수수호의 수위가 올라가게 되고, 수수호에는 잣대가 띄워져 있는데 수위가 일정 정도 이상으로 상승하면 방목(方木)을 건드리게 되고 방목 내에 설치한 구슬이 낙하하면서 자격루의 종이 울리는 원리가 적용되었다.


- 앙부일구(仰釜日晷)


1434년(세종16년)에 장영실이 제작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해시계로 '하늘을 쳐다보는 솥 모양의 해시계'라는 의미를 갖는다.

◦ 재료(청동), 구경(30~40mm정도)

◦ 구성요소 및 특징

영침(影針) : 그림자를 만들기 위해 장치된 끝이 뾰족한 막대로 길이는 앙부일구 구경의 절반쯤 되며, 영침의 끝은 앙부일구의 구심에 오게 하고 그 방향은 천구의 북극을 향하도록 일구 남국에 고정시키며, 해당 지역의 북극도 표시함

시각선(時刻線) : 일부남극에서 퍼져 나가서 일구북극에 일치하는 대원을 이루는 경선(영침의 뿌리)으로; 일구남극은 시각선의 복사점이 되는데, 이 주위를 24등분하여 15도 간격으로 시각선을 그어서 한 줄씩 걸러 묘, 진, 사, 오, 미, 신, 유 字를 표기하였으고; 일구자오선은 시각적으로 오정선이 되며, 이 선상에 午字를 써 놓은 것이며; 옛날의 시제에서는 1시간이 4각(각)이므로 15도 간격의 시선과 시각선 사이를 다시 4등분하여 각선을 세로로 그었음.

절후선(節候線) : 시각선과 직각을 이루는 13개의 위선으로; 춘추분선에 평행한 소원을 이루고; 일구적도(영침 끝을 지나 영침에 수직한 평면이 일구면과 만나는 궤적을 의미)를 표시하고 있으며, 줄 양쪽에 24절기가 표시되어, 그림자 길이에 따라 그 날이 24절기의 어는 날인가를 알게 해 줌(가장 바깥쪽은 동지, 안쪽은 하지)

◦표기방식 : 줄과 글씨를 칼로 홈을 파서 은의 끈을 묻어 두는 '은상감'방식

◦의의 : ① 양력 날짜를 알려주는 상징적 해시계인 바, 24절기는 음력 속에 포함된 양력을 가리키므로, 앙부일구는 양력 날짜를 알려주는 해시계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짐 ② 조선 초기부터 우리 선조들의 다른 세계와 지구, 우주에 대한 인식을 반영하고 있는 바, 세종의 과학정신을 반영하는 발명품(일반 서민들이 시간을 보기 쉽고 과학 문명의 혜택이 일반인들에게 널리 전파될 수 있도록 노력한 세종의 정신이 돋보이는데, 종로 1 가(혜정교), 종로 3가(종묘 앞)에 세운 것을 보면 알 수 있음)이요, 조선 초 천문역산 기술의 소산임(세종이 가장 중점을 두었던 분야의 기술력과 이해를 반영하고 있음)


- 측우기(測雨器)


최초에 만들어진(1441) 측우기는 측정할 때 너무 깊고 무거워서 불편하여, 이듬해(1442)부터는 크기를 약간 줄이고 '측우기'라고 정식으로 명명하고, 비가 올 때마다 비가 그치면 측우기 속에 고인 빗물의 깊이를 푼(약 2mm) 단위 까지 측정해서 보고하게 하였다. 각 도의 감영에서는 측우기를 나누어 주었고, 군 이하의 관청에서는 자기 또는 도기로 만들어 쓰도록 하였다. 자는 주철로 만든 것을 사용하였지만 군 이하에서는 나무자 또는 대자를 쓰도록 하였다. 즉, 이때에 벌써 전국적인 우량 관측망을 만들었으니 현대적인 기상관측의 개념이 이미 싹트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전란 때문에 측우제도는 거의 중단되어 버렸다. 영조대(1770)에 와서 다시 이를 부흥시켰으며, 측우기는 1442년의 예에 따라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때부터 관측하기 시작한 서울의 우량은 현재까지 계속되어 한 장소의 연속 관측값으로는 세계최장의 기록을 자랑하고 있다. 측우기는 1910년경만 해도 경복궁의 관상감과 함흥·대구·공주의 감영 등에 4기가 보존되어 있었음이 확인되었으나, 지금은 1기만이 보존되어 있을 뿐이다. 대구감영의 측우기는 1950년까지 서울측후소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6·25동란 중에 없어졌고, 공주감영의 금영측우기는 일본으로 반출되어 일본 기상청에 보관 중이었는데 우리 문화재 반환운동의 일환으로 1971년에 되돌려 받아 현재 기상청에서 보관중이다. 이것이 지금은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진품 측우기로 보물 제56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것은 3단 조립식으로 되어 있는데, 그 내경은 140mm, 외경은 150mm이고, 조립했을 때의 깊이는 315mm, 높이는 320mm, 상단, 중단, 하단 각각의 깊이는 106mm, 105mm, 103mm이며, 조립할 때 겹치는 부분은 3mm, 무게는 6.2kg이다. 영국의 과학박물관에는 석고로 만든 모조품 측우기가 전시되어 있고, 이밖에 놋쇠나 플라스틱으로 만든 모조품이 몇 개 더 있다. 측우대는 화강석, 대리석, 일반 석재 등으로 만든 몇 기가 보존되어 있다. 기상관측용 측기로는 Galilei의 온도계 발명이 1592년경이므로 우리의 측우기는 이보다 약 151년이나 앞서 있다. 즉, 측우기의 발명은 세계기상학사에서 관천망기시대로부터 측기시대로 전환하는 시대구분을 150년이나 앞당겨 놓은 중요한 사실인 것이다.





3-5. 맹사성 (孟思誠, 1360~1438)


○ 성장과정



1360년 송도(지금의 개성)에서 맹희도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1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 간 죽을 먹으면서 묘 앞에서 상을 치러 고향인 온양에 효자문이 세워졌다. 그의 조부(맹유)는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고려 멸망과 함께 순절했고, 아버지는 온양에 머물면서 후진 양성에 힘쓰면서 태조(이성계)가 온양에 행차하여 불러도 몸이 아프다며 나아가지 않는 등 절의를 지키지만, 아들 맹사성이 벼슬길에 나아가 조선에 충성하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 관직생활

27세(1386년)에 문과의 을과로 급제하여, 춘추관검열, 사인, 우헌납 등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수원판관이 되었다가 다시 내직으로 내사사인이 되었다. 41세(1400년, 정종2년)에 간의우산기상시-간의좌산기상시가 되었다. 태종 초에 좌사간대부(1403년/44세), 동부대언(1405년/46세/출납관장), 좌부대언(1406년/47세), 이조참의를 거쳤다. 48세에 예문관제학이 되었을 때, 마침 세자가 진표사로 명나라에 가는 길에 시종관으로 수행하여 다녀왔다. 49세에 대사헌에 올랐다. 지평 박안신과 함께 평양군 조대림( 태종의 딸인 경정공주의 부군)을 왕에게 보고 없이 잡아다가 고문하였다가 태종의 노여움을 사 처형될 위기에 처하나 영의정 成石璘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였다. 52세(1411년)에 判忠州牧事로 임명되자 예조는 관습도감제조인 그가 음률에 정통하므로 서울에 머물게 하여 선왕의 음악을 복구하기 위해 바른 음악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53세에는 영의정 하륜이 음악에 밝은 그를 서울에 머물게 하여 악공을 가르치도록 아뢰어 5월에 풍해도 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곡식이 손상된 상황을 妄報한 이유로 8월에 면직되었다. 57세에 예조판서가 되었고, 58세에는 호조판서(6월)에 이어 충청도 都觀察使(12월)가 되고 생원시의 시관이 되어 권채 등 100인을 뽑았으며 왕이 친림한 문과복시에 독권관이 되었다. 59세에는 공조판서로 되는데(6월), 부친의 병으로 사직(8월)하나 부친상 후 나라에서 효자정문과 효자비를 세워주고 다시 공조판서가 되었다. 60세(1419년, 세종1년)에는 이조판서가 되면서(10월) 예문관 대제학을 겸직(12월)하였다. 62세에는 議政府贊成事가 되었고, 66세에는 左軍都摠制府判事로서 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문신으로는 최초로 三軍都鎭撫가 되었으며, 68세에는 우의정이 되어 태종실록이 완성되자 세종이 이를 한 번 보고자 하였으나, 그는 "왕이 실록을 보고 고치면 반드시 후세에 이를 본받게 되어 사관이 두려워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하고 반대하여 사리가 분명한 그의 말에 세종이 따르기도 하였다. 1429년(70세)에 궤장(几杖宴<조선 시대에, 임금이 70세 이상의 원로 대신들에게 궤장을 하사하며 베풀던 연회로서, 대신들에게 가장 영예로운 궁중 행사> 때에 임금이 하사하던 几<앉아서 팔을 기대어 몸을 편하게 하는 것으로, 양편 끝은 조금 높고 가운데는 둥글게 우묵하고 모가 없으며, 구멍이 있어 제면(綈綿)을 잡아 매었다>와 杖<지팡이>)을 하사받았다. 71세에는 太宗實錄을 감수하였고, 72세(1431년)에는 春秋館領事를 겸임하면서 八道地理志를 찬진(撰進)하고 좌의정이 되었다. 1435년(76세)에 노령으로 사임하고 온양으로 귀향하였으며, 1438년(79세) 10월 4일 병든 몸을 치료하다가 한성에서 세상을 떠났다.




○ 평가: 타고난 문화전략가


맹사성은 창작자나 연주가, 혹은 음악을 연구한 전문학자가 아니었으나 음악에 대한 높은 경륜과, 문화와 전통을 바라보는 유연하고 참신한 사고를 겸비한 세종 시대 최고의 지성이었다. 그는 동양음악 사상 최대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것으로 평가받는 세종 시대에 음악 정책의 방향을 잡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조선왕조실록” CD-ROM에서 맹사성을 클릭해 보면, 모두 4백90건의 기사가 나오고, 그 기사들을 드문드문 발췌해 읽어보면 태조부터 세종에 이르는 여러 임금들이 무슨 일이든 맹사성과 의논하고 그에게 자문했으며, 신진 관리들이 무슨 일을 도모하려 상소를 올리면 임금은 “맹사성과 의논하라”는 말을 자주 했음을 알 수 있다. 맹사성은 세종이 ‘국가음악’의 정비사업을 이루려 할 때 매우 중요한 업적을 남겼으며, 태종 때 이미 관습도감(慣習都監)의 우두머리인 제조가 되어 있었다. 또 세종이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맹사성을 초청하고 “경(卿)이 관습도감 제조로 있으면서 새로 지은 사곡(詞曲)을 음악인들에게 가르쳐 악조에 맞게 잘 연습시켰으므로 부왕께서 기뻐하셨다”는 치하와 함께 궁궐에서 키우던 내구마(內廐馬)를 상으로 내린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세종실록”에 나와 있는 세종과 맹사성의 문답을 보면 세종의 얘기가 길고 맹사성의 대답은 아주 짧다. 이는 세종과 박연의 관계에서 볼 때 박연의 상소가 대개 길고 세종의 답이 짧은 것과 상반되는 현상이다. 이런 점 때문에 맹사성의 음악에 대한 생각이 그리 뚜렷하게 부각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맹사성은 국가의 모든 음악 제도가 중국식 아악 이론에 따라 획일적으로 구조 조정되는 대세(大勢)를 바로잡으려는 세종의 생각에 확신을 불어넣어 주는 역할을 조용히 수행하였다는 사실은 실록 여기저기서 확인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세종 7년에 임금이 이조판서 허조에게 “우리나라는 본디 향악(鄕樂)에 익숙한데, 종묘의 제사에 당악(唐樂)을 먼저 연주하고 삼헌(三獻)할 때에 이르러서야 겨우 향악을 연주하니 조상 어른들의 평시에 들으시던 음악을 쓰는 것이 어떨지 맹사성과 더불어 상의하라”고 지시한다. 또 세종이 “아악(雅樂)은 본시 우리나라 성음이 아니고 실은 중국의 성음인데, 중국 사람들은 평소에 익숙하게 들었을 것이므로 제사에 연주하여도 마땅할 것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살아서는 향악(鄕樂)을 듣고, 죽은 뒤에는 아악을 연주한다는 것이 과연 마땅한 일일까?” “악공(樂工) 황식(黃植)이 중국에 가서 아악 연주를 들으니 장적(長笛), 비파(琵琶),장고(長鼓) 등을 사이로 넣어 가며 당상(堂上)에서 연주했다고 하니 중국에서도 또한 속악(俗樂)을 섞어 쓴 것이 아닌가?”라는 의견을 연거푸 냈다. 이 때 맹사성은 “옛 글에 보면 아악과 속악(俗樂)을 섞어 연주하는 것이 삼대(三代)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모양입니다”라며 짧지만 의미 깊은 답으로 세종의 견해를 지지했다. 그렇다고 맹사성이 언제나 세종의 의견에 동조한 것만은 아니었다. 맹사성은 시대에 따라 전통이 달라지는 것이므로 반드시 옛 제도를 그대로 습용(襲用)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그 대의만 서로 통한다면 부족한 것을 보완하여 지속해야 하고, 제도를 자세히 모른다고 폐지하고 쓰지 않는다면 악이 결여(缺如)될 염려가 있음을 강조했다. 그리고 마침내 회례 아악이 제정되어 실용화 단계에 이르자 세종은 다시“어찌 회례에 중국음악을 쓰는가? 향악을 다 버리는 것은 불가하다”는 강경 입장을 보이자 맹사성은 “먼저 아악을 연주하고 향악을 겸하여 쓰는 것이 좋겠다”는 아악·향악 겸용론(兼用論)으로 당시의 문화상황과 세종의 견해를 조정하여 제도화시키기에 이른다. ‘겸하여 쓰는 것이 좋겠다’는 맹사성의 생각은 오늘날 우리가 맹사성이라는 인물을 ‘외래문화의 한국적 수용’이라는 배경으로 재조명하게 하는 핵심 문구다. ‘쓸 것’과 ‘버릴 것’이 뚜렷하게 대립하는 문화상황에서 ‘새로 재정비한 아악과 전래의 전통음악을 겸하여 쓰자’는 생각은 세종 시대의 음악 비전에 발상의 전환을 가져온 참신한 제안이었다. 맹사성이 ‘전통과 제도는 변화하는 것이므로 이론과 명분에 얽매이지 말고 필요에 따라 수정 보완하여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한 것 역시 그의 유연한 사고를 뒷받침 해 준다. 맹사성의 ‘겸용론’이 제안된 후 회례에서의 아악은 오래지 않아 폐용되었다.




○ 맹사성 관련 일화


맹사성은 검은 황소를 타고 관청에 출퇴근하는 청렴결백한 언동으로 인해 청백리로도 이름이 났고 부모에게 효성을 다한 효자로도 이름이 났다. 맹사성은 조선왕조 3대 태종대왕 때 대사헌의 직책으로 태종대왕의 부마(임금의 사위를 말함)인 조대림을 국문하여서 태종대왕의 노여움 때문에 유배생활을 했는데 성석린의 변호로 풀려났다. 맹사성은 조선왕조 4대 세종대왕 때 좌상(左相:오늘날의 부총리에 해당)의 자리에 있을 때 가끔 임금의 허락을 받아서 충남 아산시 배방면에 있는 자기의 고향집을 방문했다. 맹사성은 그 어느 해에 임금의 허락을 받아서 고향집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맹사성의 고향방문 소식이 알려지자 인근 고을 수령들이 맹사성에게 잘 보이려고 맹사성의 고향집에 이르는 길을 잘 정비하고 청소를 해 두었다. 그런데 청소를 해 둔 길에 행색이 초라한 사람이 지나가니, ‘여기는 우리의 좌상 대감이 지나갈 자리인데 너같이 초라한 사람이 먼저 지나 갈수 없다’고 핀잔을 주었다. 시골 수령들이 아무리 기다려도 좌상대감인 맹사성이 지나가지를 않자 이유를 알아본 즉, 조금 전에 행색이 초라했던 자가 바로 맹사성이었다는 이야기이다.





3-6. 계백(階伯, ?- 660년)


○ 성장과정: 자료가 없음


계백의 생애에 대하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타나지만, 출생연도및 황산벌 전투 이전의 경력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김유신(595 ~ 673)이나 연개소문(? ~ 666), 성충(605 ~ 656) 등과 출생연도가 비슷할 것으로 추측하는 정도이다.




○ 직업생활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의자왕 20년(660)에 당 고종이 소정방을 신구도대총관(神丘道大摠管)으로 삼아 군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신라와 더불어 백제를 칠 때 계백은 장군이 되어 결사병 5천 명을 뽑아 대항하면서 “당나라와 신라의 대군을 당해내야 하니 국가의 존망을 알 수 없다. 내 처와 자식들이 포로로 잡혀 노비가 될 지 모르는데, 살아서 욕을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쾌히 죽는 것이 낫다.”고 하면서 가족을 모두 죽였다. 신라군이 황산(黃山) 벌판으로 진군하니, 백제 장군 계백(伯)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하여 세 군데에 진영을 설치하고 신라의 군사를 맞아 싸울 때 뭇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맹세하였다. “옛날 (越王) 구천(句踐)은 5천 명으로 吳나라 70만 군사를 격파하였다. 오늘은 마땅히 각자 용기를 다하여 싸워 이겨 국은에 보답하자.” 이에 힘을 다하여 싸워 네 번 모두 백제가 승리하면서 신라 군사가 물러났다.

이에 (신라장군) 흠순이 아들 반굴(盤屈)에게 “신하된 자로서는 충성만한 것이 없고 자식으로서는 효도만한 것이 없다. 이런 위급함을 보고 목숨을 바치면 충(忠)과 효(孝)를 모두 갖추게 된다.”고 말하자, 반굴이 그 분부를 알아듣고는 곧 적진에 뛰어들어 힘써 싸우다가 죽었다. 또한, (신라의) 좌장군 품일이 아들 관창(官昌)을 불러 말 앞에 세우고 여러 장수들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내 아들은 나이 겨우 열 여섯이나 의지와 기백이 자못 용감하니, 오늘의 싸움에서 능히 삼군(三軍)의 모범이 되리라!” 이에 관창이 갑옷 입힌 말을 타고 창 한 자루를 가지고 쏜살같이 적진에 달려 들어갔다가 적에게 사로잡혀 계백에게 끌려갔다. 계백이 투구를 벗기게 하고는 그의 나이가 어리고 용감함을 아껴서 차마 해치지 못하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신라에게 대적할 수 없겠구나. 소년도 오히려 이와 같거늘 하물며 장정들이랴!” [그리고는] 살려 보내도록 하였다. 관창이 [돌아와]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제가 적진 속에 들어가 장수를 베지도 못하고 깃발을 뽑아오지도 못한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말을 마치자 손으로 우물물을 떠서 마신 다음 다시 적진으로 가서 날쌔게 싸웠는데, 계백이 사로잡아 머리를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보냈다. 품일이 그 머리를 붙잡고 흐르는 피에 옷소매를 적시며 말하였다. “내 아이의 얼굴이 살아있는 것 같구나! 왕을 위하여 죽을 수 있었으니 다행이다.” 삼군(三軍)이 이를 보고 분에 복받쳐 모두 죽을 마음을 먹고 북치고 고함지르며 진격하니, 백제의 무리가 크게 패하면서 마침내 계백이 죽고, 좌평 충상(忠常)과 상영(常永) 등 20여 명은 사로잡혔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의자(義慈)는 영웅스럽고 용맹하고 담력이 있었으며, 부모를 효성스럽게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 당시 사람들이 그를 해동증자라 했다. 그러나, 641년 왕위에 오르자 주색에 빠져 정사는 어지럽고 나라는 위태로워졌다. 좌평(佐平) 성충(成忠)이 애써 간했으나 듣지 않고 도리어 옥에 가두었다. 당나라 군사와 신라 군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을 때 의자왕은 장군 계백을 보내 결사대 5,000명을 거느리고 황산(黃山)으로 나가 신라 군사와 싸우게 했더니 계백은 네 번 싸워 네 번 다 이겼다. 하지만 군사는 적고 힘이 다하여 마침내 패하고 계백은 전사했다. 이에 당나라 군사와 신라 군사는 합세해서 전진하여 진구(津口)까지 나가서 강가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 평가: 투철한 국가관을 보인 계백


660년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이끄는 5만 군대가 사비성(泗沘城) 가까이까지 이르고,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이 거느린 13만 대군이 백강(白江) 어귀로 진입하여 백제를 위협하자, 당시 달솔(達率)이던 계백은 백제의 결사대 5천명을 이끌고 출전하였다. 그에 앞서 "지금 국가의 앞날을 알 수 없다. 내 처와 자식이 적군의 포로가 되어 노비가 될지도 모르는데, 살아서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라고 말한 뒤 가족을 모두 죽였다고 한다. 계백의 결사대는 황산(黃山)의 들판에서 신라군대와 네 차례 전투를 벌이는 동안 신라 군사들의 사기를 꺾고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 16세의 어린 나이로 신라군의 부장(副將)이던 화랑 官昌이 죽기를 각오하고 백제의 진지로 달려 들어오자 포로로 잡았다가 돌려보내고 다시 도전하자 이번에는 계백이 그를 잡아 목 벤 후 머리를 말안장에 매어 신라 쪽으로 돌려보냈는데, 이에 분격한 신라군이 용기백배하여 총공격해 오므로 맞아 싸우다 죽었다고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에 계백에 관한 전기가 간략하게 실려 있다. 계백은 후대에 충절의 표상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는 쓰러져 가는 백제의 마지막 국운을 짊어진 듬직한 장군이었다. 당시 백제는 의자왕의 실정으로 국가의 운명은 떨어진 것과 같은 것이었음에도 계백은 나라에 대한 충절이 변치 않고 한결 같았다. 계백은 비운의 국가인 백제의 허망한 소멸에 그나마 빛이 되어준 충신이었다. 그의 충정과 장군으로서의 책임감은 칠 흙 같은 야밤에 한 줄기 달빛이 되어 백제의 소멸을 밝게 비추는 등불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러한 영웅에게도 어김없이 위기의 발길이 찾아온다. 때는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과 백강으로 물밀듯이 진격해 오자 계백은 결사대 5천을 뽑아 황산벌에 나가 5만여 신라군과 맞부딪치게 된다. 그는 '월왕 구천은 5천명으로 오나라 부차의 70만 대군을 무찔렀다. 오늘 마땅히 각자 분전하여 승리를 거두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라' 고 격려하며 결사항전을 준비한다. 그는 또한 자신의 칼 아래 가족의 운명을 정하게 된다. 그는 신라와의 4번에 걸친 전쟁에서 전승을 올리지만, 반굴, 관창 등 소년 화랑의 전사로 신라의 사기가 높아지면서 그는 장렬히 전사한다.

장수가 되어 내 집과 내 몸을 잊은 뒤라야 사졸(士卒)들의 죽을 결심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니, 만약 조금이라도 내가 먼저 살고자 하는 마음을 둔다면 군심(軍心)이 해이되어 각각 제 살 궁리와 처자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법이다. 당시 백제가 망하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이기에 자신의 처자가 욕을 당하지 않도록 몸소 죽이고, 자신도 싸우다가 죽은 그 뜻과 절개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더구나, 백제가 망할 때 홀로 절개를 지킨 점은 가히 “나라와 더불어 죽는 자”라고 칭송함에 부족함이 없다. 그래서 계백의 이러한 투철한 국가관은 후대인들의 높은 칭송의 대상이 되었고, 특히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에게는 그대로 계승되어 계백은 충절의 표본으로 여겨졌다.





3-7. 정약용(丁若鏞, 1762~1836)


○ 성장과정


1762년(영조 38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지금의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에서 4남 1녀 가운데 4남으로 출생하였다. 4세(1765년, 영조 41년)에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6세 때 부친이 연천현감으로 부임하자 따라가 부친의 교육을 받았으며, 7세에 ‘산’이라는 제목의 오언시를 지었는데,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으니,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다산의 아버지는 그의 명석함에 놀랐다. 천연두를 앓아 오른쪽 눈썹 위에 흔적이 남아 눈썹이 세 개로 나누어지자 스스로 호를 삼미자(三眉子)라고 하였다. 《삼미자집》이 있는데, 이는 10세 이전의 저작들이다. 9세에 모친 해남 윤씨(고산 윤선도의 증손인 尹斗緖는 다산의 외증조부)가 세상을 떠났다. 다산의 얼굴 모습과 수염이 윤두서를 많이 닮았고, 다산이 일찍이 문인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정분(精分)은 외가에서 받은 것이 많다.”라 하였다. 10세에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수학하였는데, 이 때 경서와 사서를 본떠 지은 글이 자기 키만큼 되었다.

13세(1774, 영조 50년)에 杜詩를 본떠 시를 지었는데, 부친의 친구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15세에 결혼하였는데, 이 때 진주공이 호조좌랑이 되어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따라 살림집을 세내어 서울 남촌에 살았다. 16세(1777년, 정조1년)에 선배 이가환과 자형 이승훈을 추종하여 李瀷의 유고를 보고 사숙하였다. 17세 겨울에 둘째형(정약전)과 함께 화순현에 있는 東林寺에서 독서하며 《맹자》를 읽었다. 18세에 부친의 명으로 공령문(功令文)을 공부하고, 성균관에서 시행하는 승보시(陞補試)에 선발되었다. 정약전이 권철신을 스스로 모셨는데, 기해년(권철신 44세, 정약전 22세, 정약용 18세) 겨울 天眞庵 走魚寺에서 강학회를 열었다. 눈 속에 이벽이 밤중에 찾아와 촛불을 켜놓고 경전에 대한 토론을 밤새며 하는데, 그 후 7년이 지나 서학에 대한 비방이 생겨, 그처럼 좋은 강학회가 다시 열릴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19세 때 부친이 예천군수로 부임하자 그곳에서 반학정(伴鶴亭), 촉석루(矗石樓)를 유람하며 독서하고 시를 지었다. 20세(1781년, 정조5년)에 서울에서 과시(科詩)를 익혔고, 7월에 딸을 낳았는데 5일 만에 죽었다.

22세에 성균관에 들어갔고, 2월에 순조의 세자책봉을 경축하기 위한 增廣監試에서 둘째형과 함께 경의(經義) 초시(初試)에 합격하고, 4월에 회시(會試)에서 생원으로 합격하였다. 23세에 鄕射禮를 행하고, 〈중용강의〉 80여 항목을 바쳤는데, 율곡의 기발설(氣發說)을 위주로 하는데 정조가 감탄하였다. 이벽(李檗)을 따라 배를 타고 두미협(斗尾峽)을 내려가면서 서교(西敎)에 관한 얘기를 듣고 책 한 권을 보았다. 《성호사설》을 통해 상위수리(象緯數理)에 관한 책들 이외에 서양인 방적아(龐迪我)의 《칠극(七克)》, 필방제(畢方濟의 《영언여작(靈言蠡勺)》, 탕약망(湯若望)의 《주제군징(主制群徵)》 등의 책을 열람하였다. 6월에 반제(泮製)에 뽑히고 9월에 정시(庭試)의 초시에 합격하였다. 24세에 반제에 뽑혀 상으로 종이와 붓을 하사받았고, 10월에는 정시의 초시에 합격하였으며, 11월에는 감제(柑製)의 초시에 합격하였고, 겨울 제주도에서 귤을 공물로 바쳐와서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였는데, 다산이 초시에 수석으로 합격하였으며, 12월에 임금이 춘당대에 친히 나와 식당에서 음식을 들면서 食堂 이름을 짓도록 하는데, 다산이 수석을 차지하여 《대전통편(大典通編)》한 질을 하사받았다. 25세에 別試의 초시에 합격하였고, 8월에는 到記(식당장부)의 초시에 합격하였다. 26세 때 반제에 수석으로 뽑혀 《국조보감(國朝寶鑑)》 한 질과 백면지(白綿紙) 1백 장을 하사받았고, 8월 성균관 시험에 합격하여 《병학통(兵學通)》을 교지와 함께 하사받았다. 27세(1788년, 정조12) 때 熙政堂에서 임금을 뵈오니 책문(策文)이 몇 수인가를 물었고, 3월에 반제에 수석 합격하여 희정당에서 임금을 뵈오니 초시와 회시의 회수를 질문하였다.




○ 관직생활

28세 1월 임금이 4번 초시를 본 것을 확인하고 급제하지 못함을 민망히 여겼고, 3월에 殿試에 나가서 探花郞의 예로써 7품관에 부쳐져서 희릉 직장(禧陵直長)에 제수되었고, 초계문신(抄啓文臣)에 임명되었다. 5월에 부사정(副司正)으로 옮겼고, 6월에 가주서(假注書)에 제수되었으며, 이 해 문신의 시험에 수석을 5번, 수석에 비교된 것이 8번이었다. 겨울에 주교(舟橋)를 설치하는 공사가 있었는데, 다산이 그 규제(規制)를 만들어 공(功)을 이루었다. 29세에 翰林會圈에서 뽑히고, 翰林召試에서 뽑혀 예문관 검열(檢閱)에 단독으로 제수되었으며, 3월 8일 해미현(海美縣)으로 정배(定配)되었고, 5월에 예문관 검열로 다시 들어가고, 7월에 사간원 正言에 제수되었으며, 9월에 사헌부 지평(持平)에 제수되어 武科監臺에 나아갔다. 30세(1791년, 정조15년) 5월에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고, 10월에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으며, 겨울에 詩經義 800여 조를 지어 올렸는데 임금이 그 책에 대해서 비지(批旨)를 내리기를 “널리 백가를 인용하여 문장으로 표현해 놓은 것이 무궁하니, 참으로 평소 학문이 축적되어 해박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와 같이 훌륭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칭찬하였다.

31세 되는 해의 3월 홍문관록(弘文館錄)과 도당회권(都堂會圈)에서 뽑혀 홍문관 수찬(修撰)에 제수되었다. 4월에 부친상을 당하여 廣州에 여막을 짓고 거처하였다. 겨울에 수원성의 규제를 지어 올리고, 起重架圖說을 지어 올려서 4만 냥을 절약하였다. 33세 7월에 성균관 직강(直講)에 제수되었고, 8월 비변랑(備邊郞)에 임명하는 계(啓)가 내려졌으며, 10월에는 홍문관 교리(校理)에 제수되었다가 수찬에 제수되었다. 34세 1월 사간원 사간(司諫)에 제수되고, 품계가 통정대부에 오르고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2월에는 병조 참의에 제수되어, 임금이 수원으로 행차할 때 시위(侍衛)로서 따랐고, 3월 3일,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제수되었다. 《화성정리통고(華城整理通攷)》의 찬술과 원소(園所 : 장헌세자의 능인 顯隆園의 터)를 설치하라는 명을 받고, 이가환ㆍ이만수ㆍ윤행임 등과 합작하였다. 4월에 규영부 교서직에서 정직(停職)되었는데, 이는 헛소문을 선동하여 모함하고 헐뜯고 간사한 꾀를 쓴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산이 이때부터 가슴속에 우울한 마음이 생겨 다시는 대궐에 들어가 교서를 하지 아니하였다. 7월에는 주문모 입국사건으로 金井道(洪州에 있는 지명) 찰방(察訪)으로 외보(外補)되었을 때 이삼환(李森煥 : 성호 이익의 증손)에게 청하여 온양의 石巖寺에서 만났는데, 당시 내포(內浦)의 이름 있는 집 자제들이 소문을 듣고 모여들어 날마다 수사(洙泗)의 학(學)을 강학하고, 사칠(四七)의 뜻과 정전(井田)의 제도에 대해서 물었으므로 별도로 문답을 만들어 〈서암강학기(西巖講學記)〉를 지었다. 성호유고를 가져다 처음 《家禮疾書》로부터 교정하고, 《퇴계집》 반 부를 가져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바로 그가 남에게 보낸 편지 한 편을 읽은 뒤에 아전들의 인사를 받았다. 정오가 되면 연의(演義) 1조(一條)씩을 수록(隨錄)하여 스스로 경계하고 성찰하였는데, 그것을 이름하여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이라 하니, 모두 33칙(則)이다. 12월에는 용양위 부사직으로 옮겨졌다. 35세 10월에 규영부 교서가 되었고, 《史記英選》의 제목과 《규운옥편(奎韻玉篇)》의 범례에 자문하였으며, 이만수 등과 더불어 《사기영선》을 교정하였고, 12월에 兵曹參知에 제수되었다. 36세에 곡산 부사(谷山府使)에 제수되었고, 겨울에 《마과회통(麻科會通)》 12권을 완성하였다. 37세에 史記纂註를 올렸고, 五禮儀圖尺과 실제 척이 달라서 척을 바로잡았으며, 종횡표를 만들어 호적·군적을 정리하였다. 38세에 刑曹參議에 제수되었고 〈초도둔우계(椒島屯牛啓)〉를 올렸다. 39세(1800년, 정조24년)에 정조가 승하하였고, 겨울에 졸곡(卒哭)을 지낸 뒤 초천(苕川)의 별장으로 돌아가 형제가 함께 모여 날마다 경전을 강(講)하고, 그 당(堂)에 ‘여유(與猶)’라는 편액을 달았으며, 이 해에 《文獻備考刊誤》가 이루어졌다. 40세 2월 사간원의 啓로 인하여 9일 하옥되었는데, 이것이 ‘책롱사건(冊籠事件)’의 발단이었다. 19일 만에 출옥되어 장기(長鬐)로 유배되었다. 3월에 장기에 도착하여 《이아술(爾雅述)》 6권과 《기해방례변(己亥邦禮辨)》을 지었는데, 겨울 옥사 때 분실되었다. 여름에 성호가 모은 1백 마디의 속담에 운을 맞춰 지은 《百諺詩》가 이루어졌고, 10월,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손암과 함께 다시 투옥되었고, 다산은 강진현으로, 손암은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42세(1803년, 순조3년) 봄에 〈단궁잠오(檀弓箴誤)〉, 여름에 〈조전고(弔奠考)〉, 겨울에 〈예전상의광(禮箋喪儀匡)〉이 각각 이루어졌다. 이듬 해 봄에 〈아학편훈의(兒學編訓義)〉가 이루어지고, 44세 여름에 〈정체전중변〉(일명 〈기해방례변〉) 3권이 이루어졌으며 그 해 겨울에 큰아들 학연이 찾아와 보은산방(寶恩山房)에 나가 밤낮으로 《주역》과 《예기》를 가르치면서 혹 의심스러운 곳이 있어 그가 질문한 것을 답변하여 기록해 놓았는데, 모두 52칙이었고 이를 이름하여 〈승암문답(僧菴問答)〉이라고 하였다. 46세에 《상례사전(喪禮四箋)》 50권이 완성되었고 〈예전상구정(禮箋喪具訂)〉 6권이 이루어졌다. 47세 봄에 茶山(강진현 남쪽의 만덕사(萬德寺) 서쪽에 있는데, 處士 윤단(尹慱)의 山亭임)으로 옮겨 거처하였다. 공이 다산으로 옮긴 뒤 臺를 쌓고, 못을 파고, 꽃나무를 열 지어 심고, 물을 끌어 폭포를 만들고, 동쪽 서쪽에 두 암자를 짓고, 서적 천여 권을 쌓아놓고 글을 지으며 스스로 즐기며 석벽(石壁)에 ‘정석(丁石)’ 두 자를 새겼다. 《주역》의 어려운 부분을 들추어 〈다산문답〉 1권을 썼다. 여름에 가계(家誡)를 썼고, 겨울에 〈제례고정(祭禮考定)〉과 《주역심전(周易心箋)》이 이루어졌으며, 〈독역요지(讀易要旨)〉 18칙과 〈역례비석(易例比釋)〉을 지었다. 〈춘추관점(春秋官占)〉에 보주(補注)를 내고, 〈대상전(大象傳)〉과 〈시괘전(蓍卦傳)〉을 주해하였으며, 〈설괘전(說卦傳)〉을 정정하고, 《주역서언(周易緖言)》 12권이 이루어졌다. 48세(1809년) 봄에 〈예전상복상(禮箋喪服商)〉과 《상례외편(喪禮外篇)》 12권이 완성되었고, 가을에 《시경강의(詩經講義)》를 산록(刪錄)하였는데, 《모시강의(毛詩講義)》 12권을 첫머리에 놓고 따로 《시경강의보유》 3권을 지었다. 49세 봄에 《관례작의(冠禮酌儀)》ㆍ《가례작의(嘉禮酌儀)》가 이루어졌고, 봄·여름·가을에 3차례 가계(家誡)를 썼으며, 겨울에 《소학주관(小學珠串)》이 이루어졌다. 50세 봄에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겨울에 〈예전상기별(禮箋喪期別)〉이 이루어졌다.

51세(1812년, 순조 12년) 봄에 《민보의(民堡議)》가 이루어지고, 겨울에 《춘추고징(春秋考徵)》 12권이 완성되었으며, 〈아암탑문(兒菴塔文)〉을 지었다. 52세 겨울에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가 이루어졌는데, 이 책은 여러 해 동안 자료를 수집하여 이해 겨울에 완성하는데 40권이다. 53세 4월에 조장한(趙章漢)이 사헌부에 나아가 특별히 대계(臺啓)를 정지시켜, 죄인명부에서 그 이름이 삭제되었다. 그때 의금부에서 관문(關文)을 발송하여 석방시키려 하는데 강준흠(姜浚欽)의 상소로 막혀서 발송하지 못하였다. 여름에 《맹자요의(孟子要義)》가 이루어지고, 가을에 《대학공의(大學公議)》 3권과 《중용자잠(中庸自箴)》 3권 그리고 《중용강의보》가 이루어졌으며, 겨울에 《대동수경(大東水經)》이 이루어졌다. 54세 봄에 〈심경밀험(心經密驗)〉과 〈소학지언(小學枝言)〉이 이루어졌다. 55세 봄에 《악서고존(樂書孤存)》이 이루어졌다. 56세 가을에 《상의절요(喪儀節要)》가 이루어졌고, 《방례초본(邦禮艸本)》의 저술을 시작했는데 끝내지는 못하였으며, 뒤에 《경세유표》로 개명하였다. 57세 봄에 《목민심서》가 이루어졌고, 여름에 《국조전례고(國朝典禮考)》 2권이 이루어졌으며, 8월에 이태순(李泰淳)의 상소로 관문(關門)을 발하여 다산을 떠나 14일 비로소 열수(한강상류)의 본집으로 돌아왔다. 58세 여름에 《흠흠신서(欽欽新書)》가 이루어진 바, 이 책의 처음 이름은 《명청록(明淸錄)》이었는데 후에 우서(虞書)의 “흠재흠재(欽哉欽哉)” 즉 형벌을 신중히 하라는 뜻을 써서 이 이름으로 고쳤다. 겨울에 《아언각비(雅言覺非)》 3권이 이루어졌다. 60세 봄에 〈사대고례산보(事大考例刪補)〉가 이루어졌다.

61세(1822년, 순조22년)에 신작(申綽)의 편지에 답하면서 육향의 제도를 논하였다. 62세에 승지(承旨) 후보로 낙점되었으나 얼마 후 취소되었다. 69세 5월 익종(翼宗 : 순조 아들)이 위독하여 약원(藥院)에서 약을 논의할 것을 청하여 약을 달여 올리기로 했는데, 채 올리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73세(1834년, 순조 34년) 봄에 《상서고훈(尙書古訓)》과 《지원록(知遠錄)》을 개수(改修)하고 합하여 모두 21권으로 만들었고, 가을에 다산에 있을 때 《상서》를 읽으면서 매색(梅賾)의 잘못된 이론을 잡아서 논술했던 《매씨서평(梅氏書平)》을 개정하였다. 75세(헌종2년) 2월 열상(洌上)의 정침(正寢)에서 생을 마쳤다. 이 날은 다산의 회혼일(回婚日)이어서 族親이 모두 왔고 門生들이 다 모였다. 장례 절차는 모두 유명(遺命) 및 〈상의절요(喪儀節要)〉를 따랐다. 4월 1일에 유명대로 여유당(與猶堂) 뒤편 광주(廣州) 초부방(草阜坊) 마현리(馬峴里) 자좌(子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1910년 7월 18일에 특별히 정헌대부(正憲大夫)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을 추증(追贈)하고 문도공(文度公)의 시호를 내렸다.




○ 평가 : 다양한 직업세계와 활동


그의 유배생활을 통해 조선사회의 현실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여러 사상과 학문을 검토하여 조선후기의 실학사상을 집대성하였다. 정약용의 학문체계는 사상적으로 유형원과 이익의 주류를 계승하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 북학파의 사상도 흡수하였고 이기론(理氣論)에 있어서 이황과 이이의 학설을 종합하였다. 그의 개혁론의 방향은 지주에 의한 토지의 사적 소유와 불로소득, 그로 인한 농민들의 파산과 빈궁 등의 문제 해결에 있었다. 그는 정치의 기본은 균민(均民)에 있다고 보고 균민정치가 바로 왕도정치(王道政治)라고 인식하였으나 봉건국가와 왕권 자체를 부인하지는 못했다. 마찬가지로 봉건통치체계를 형성하는 관리의 존재도 부인하지 않았으며 오직 선량한 관리로 교체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정통적인 이상적 유교정치론인 왕도정치, 덕치(德治), 인정(仁政)사상 등이 그 저변에 반영되어 있다. 토지개혁도 農者有田과 兵農一致의 원칙 아래 농민의 토지소유개혁론을 제시했다. 이런 내용은 정조대왕과의 관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첫째가 정치관료로서의 만남이다. 정약용의 나이 28세인 1789년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종7품인 희릉직장으로 시작한 벼슬길은 정조의 총애 아래 잘 닦은 신작로를 달리는 것처럼 순조로웠다. 과거에 합격한 바로 그 해에 초계문신으로 뽑힌다. 정3품 아래의 당하문관 중에서 문학에 재질이 있는 자를 뽑아 국왕이 직접 지도 · 편달하면서 재교육하는 제도인 초계문신제는 정조의 강력한 개혁정치를 뒷받침할 신진 엘리트 관료집단을 양성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초계문신들과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에서 직접 얼굴을 맞대고 책을 읽고 토론을 하면서 정조는 개혁의 필연성을 설파하고 그 방법과 방향을 함께 모색하였다. 당파싸움으로 날이 새고 지는 암울한 상황을 개혁의 중심세력이라 할 이 신진엘리트들의 도움아래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정면 돌파하고자 하는 정조의 야심이 숨어 있었다.

둘째는 기술관료로서의 만남이다. 다산은 자연과학과 기술, 특히 이용후생과 관련된 기술분야에서는 독창적인 업적을 남겼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거기에 화성을 만들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신도시'개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정조의 원대한 포부를 실현하는데는 다산처럼 자신과 개혁적 성향을 함께하면서도 과학기술에 능통한 관리가 필요하였다. 매년 봄 화성의 현륭원(사도세자의 묘)에 능행(陵幸)하기 위해서는 한강을 건너야 하는데, 여기엔 배다리(舟橋)가 필요하였다. 정조의 왕조개혁 구상과 직결된 배다리를 완벽하게 만들어낸 다산은 더욱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된다. 배다리에 이어 다산의 기술적 역량이 발휘된 사업은 화성 축조이다. 기존의 조선과 중국(청나라)의 성제를 바탕으로 벽돌을 이용하고, 성벽의 중간부분을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등 독창성을 발휘해 좀 더 선진화된 성제를 보여줬다. 또 정조가 직접 하사한 책을 비판적으로 연구하여 기중기를 설계해 4만냥 이상 절약하고 일반 백성을 부역에 동원하지 않게 하였다.

셋째는 학문세계였다. 다산이 서학에 대해 가졌던 이중적 태도 역시 정조에 대한 충성과 사상적 친밀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다산은 젊어서 서학에 깊이 경도되었으나 정조와 만나면서부터 거리를 두었고, 과거 서학에 몸담았던 행위를 잘못이라고 인정했다. 이는 수많은 순교자를 낸 천주교의 입장에서는 변절이나, 다산의 정체성은 유학자로 시작해 유학자로 귀결된 것이다. 그리고 다산이 그러한 의식을 되찾게 만든 데에는 정조의 역할이 매우 컸다.


다산 정약용은 정치적으로 처절한 패배자였다.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서 암행어사도 해 보고, 한 시절 정조(正祖)의 총애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기독교와 서학(西學)에 빠져 있다는 이유로 공격을 받고 18년간을 유배당하는 신세가 된다. 식견과 경륜을 펴지 못한 채 패가망신의 아픔을 삭이는 긴긴 세월. 그 인고(忍苦)의 나날이 그를 ‘한자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대학자’(정인보 선생의 말)로 끌어올렸다. 그의 글에 나오는 그의 고통의 편린은 시대의 강을 건너 가슴 저미게 하는 데가 있다. “정치의 잘못을 일깨워 주지 않는 시(詩)는 시가 아니다”, “우리 집은 폐족(廢族)이다. 벼슬은 못하지만 성인(聖人)이야 되지 못하겠느냐. 문장가가 못되겠느냐”, “폐족이 글을 읽지 않고 몸을 바르게 행하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 구실을 하랴.” 머나먼 적소(謫所)에서 글을 띄워 자식들을 일깨우고 채찍질했다. “임금의 존경을 받아야지, 총애만 받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임금을 기쁘게 해 주는 사람이 되는 게 그리 중요하겠느냐. 임금은 얼굴빛이나 살피고, 비위를 잘 맞추는 사람, 벼슬 버리기를 어려워하는 사람, 권력자에게 이리저리 붙는 사람을 존경할 리가 없다. 임금이 첩같이 다루고 노예처럼 부려먹으려는 존재란 고달프고 힘들기만 할 뿐이니라.” 다산은 너무 오랜 시간 붓으로 저작을 계속해 어깨 통증에 시달릴 정도였다. 편지만 쓴 게 아니라 목민심서(牧民心書)를 비롯한 불후의 저작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언관(言官)의 역할과 자세도 말했다. “임금의 잘못을 공격하고, 아래로는 백성의 고통을 알려지게 하고, 잘못된 관리는 물러나게 해야 한다. 모름지기 언관은 편을 갈라 다른 편을 구렁텅이에 밀어 넣는 짓을 해서는 안 되고 지극히 공정하게 일해야 한다.” 정치기구의 개혁, 지방행정의 쇄신을 외쳤던 다산의 개혁정신은 여전히 유효하다.





3-8. 이규보(1168∼1241년)


○ 성장과정


1168년 12월 26일에 출생하였는데, 꿈에 규성(奎星)이 나타나 신이한 행적을 보여 규보라는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이고, 벼슬은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숙공(文肅公)이다. 증조(殷伯)는 중윤(中尹)을 지냈고, 조부(和)는 검교대 교위였으며, 아버지(윤수/允綏)는 호부낭중(戶部郞中)이고, 어머니 김씨는 금양현(金壤縣) 사람으로 공이 귀하게 됨에 따라 금란군군(金蘭郡君)에 봉하여졌는데, 울진현위(蔚珍縣尉) 시정(施政)의 딸이다. 10세(1177년)에 중국의 고전들을 읽기 시작하여 문재가 뛰어남을 보였다. 15세에 시를 빨리 지어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를 가리켜 주필 이당백(走筆 李唐白)이라고 하였다.


22세(1189년) 때 사마시(司馬試)에 수석 합격하였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시험날 과거를 담당하는 관리가 그 명성을 중하게 여겨 임금이 내린 술 너댓 잔을 마시게 하였는데, 조금 취하여 글이 정취하게 지어지지 않았으므로 과거의 성적이 좋지 못하였다. 사퇴하고 다시 응시하려 하자 아버지가 엄하게 나무랐다. 또한 전례가 없으므로 사퇴하지 못하였으나, 하객들에게 "과거의 성적은 비록 아래이지만, 어찌 서너 번 문생(門生)을 단련시키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하였다 한다. 25세에 개경의 천마산에 들어가 세상을 관조하며 지내다가 26세에 개경에 돌아왔으나, 가난에 쪼들리게 되고, 이 때, 「동명왕편」, 「개원천보영사시」 등을 지었다. 30세에 최충헌 정권의 요직에 있었던 조영인, 임유, 최선 등에게 관직이 없음을 통탄하며 지방관이라도 달라는 서신을 썼다.


○ 관직 생활


32세(1199년)에 전주사록(全州司錄)이 되었으나 동료의 비방에 의해 1년 4개월만에 면관되었다가, 35세에 병마녹사 겸 수제(兵馬錄事兼修製)가 되었으며, 40세에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권보직한림(權補直翰林)으로 발탁되었다.


45세(1212년) 정월에 천우위녹사참군사(千牛衛錄事叅軍事)에 제수되어 한림원에서 나왔으며 6월에 직원(直院)으로 복직하였고, 12월에는 7품직을 거치지 않고 사재승(司宰丞)이 되었으며 직원을 겸하였다. 48세에 우정언(右正言)에 제배되고 좌우사간(左右司諫)을 역임하였으며, 50세에 우사간이 되었는데 무고로 정직 당하였고 3개월 뒤 좌사간으로 좌천되었다.


52세(1219년)에 좌사간(左司諫)으로서 지방관의 죄를 묵인하여 면직되나 최이(崔怡)의 도움으로 계양도호부부사(桂陽都護府副使)로 좌천되어 부임하였다가 이듬 해 예부낭중(禮部郞中)·한림시강학사(翰林侍講學士)가 되었다.


63세(1230년)에 위위시판사(衛尉寺判事)가 되었으나, 팔관회(八關會) 행사에 잘못을 저질러 한때 위도(蝟島)에 유배되었고, 64세 9월부터 산관으로 있으면서 몽고에 대한 국서작성을 담당하였으며, 65세에 비서성판사(書省判事)로 승진하였다. 66세 6월에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 우산기상시 보문각학사(銀靑光祿大夫 樞密院副使 右散騎常侍 寶文閣學士)에 제수되었고, 12월에 상부(相府)에 들어가서 금자광록대부 지문하성사 호부상서 집현전대학사 판예부사(金紫光祿大夫 知門下省事 戶部尙書 集賢殿大學士 判禮部事)가 되었다. 68세 12월에는 참지정사 수문전대학사 판호부사 태자대보(叅知政事 修文殿大學士 判戶部事 太子大保)가 되었고, 70세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감수국사(監修國事)·태자대보(太子大保)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74세(1241년)에 병이 나고, 자신이 지은 문집을 모아서 기술자에게 명하여 판(版)에 새기게 하였으며, 75세에 돌아가시니 왕께서 관리를 보내어 장례를 치르게 하였으며, 강화군(江華郡) 길상면(吉祥面) 길직리(吉稷里)에 있는 직산(稷山)의 자좌(子坐 : 북쪽이 뒷편임)의 언덕에 장례를 지냈다.


○ 평가: 고려의 대문호


일찌기 한 차례 성균시(成均試)를 주재하고, 세 차례 예부시(禮部試)를 주관하였는데 뽑힌 이들 중 운사(韻士)가 많았다. 벼슬에서 물러난 이래 시와 술로 스스로 즐기며 항상 『능엄경(楞嚴經)』을 읽었는데 그 송(頌)이 (문집) 제9권에 실려 있다. 또한 국가에서 큰 책봉이 있을 때나 외국에 보내는 서(書)와 표(表)를 짓지 않은 것이 없었다. 호탕 활달한 시풍(詩風)은 당대를 풍미했으며, 특히 벼슬에 임명될 때마다 그 감상을 읊은 즉흥시는 유명하다. 몽골군의 침입을 진정표(陳情表)로써 격퇴한 명문장가였다. 시·술·거문고를 즐겨 삼혹호선생이라 자칭했다.

고려의 대문호, 천재시인, 동방문학의 관(冠) 동방의 시호(詩豪) 등이 이름에 항상 따라 붙는 뛰어난 문학인이 바로 이규보이다. 이규보는 고려 전기와 후기의 분수령인 무신 집정기를 가장 적극적으로 대처하며 살아간 신흥 사대부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유교적 현실관을 지키면서 민속신앙과 仙道思想에도 깊은 관심을 지녔으며, 마지막엔 불교에 귀의했다. 이처럼 폭넓은 사상과 신앙의 층위를 가졌던 그는 어린시절부터 찬사를 받은 문학적 재능을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만 사용하지 않았다. 국가적 요청에 부응해 나라를 빛내는 이른바 以文華國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무엇보다 그는 “시마(詩魔)에 붙들려 창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고 고백한 것처럼 실제 창작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문학사상을 펼쳐보였다. 나아가 당대 무신 집정기의 사회적 모순과 민중의 비참한 실정을 문학과 정치를 통해 비판적으로 극복하려고 노력한 중세 지식인이었다. 그의 작품에는 국가와 민족에 대한 폭넓은 관심과 사랑이 담겨있고, 이를 진지하게 고민한 흔적이 많다. 일부에서는 이규보를 무신 정권에 영합한 어용시인으로 폄하하는 경우도 있다. 벼슬에 오르기 위해 남겨 놓은 구관시(求官詩)나, 최씨 정권의 권력자들에게 총애를 받았던 그의 출사 이후의 삶을 단편적으로만 본다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규보는 결코 쉽게 세상과 타협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이규보의 나이 26세 때, 그는 『구삼국사』에서 구전되어 온 동명왕의 사적이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라 신성한 사실임을 확신하였다. 결국 그는 <동명왕편>이란 고체시의 대장편 서사시를 지었다. 이규보가 <동명왕편>을 창작한 배경에는 그가 민중 사이에 널리 유포되어 전하는 동명왕 이야기를 유교적 현실주의 관점에서 괴력난신으로만 취급하는 자세를 버리고, 동명왕과 같은 건국시조에 대한 민중의 신앙을 당대 지식층․지배층에까지 널리 알리고자 한 것이다.

이규보는 20대에 급제한 후 8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보직을 받을 수 없었던 불우한 시기가 있었는데, 이러한 불행이 오히려 그의 창작력의 배경이 되었다. 그는 천성이 자유로움을 좋아하는 문학적, 문사적 기질이 풍부한 사람이었기에 관직에 얽매이지 않았던 이 시기에 정열적인 시문 창작이 가능했다. 그의 나이 32세 무렵, 당시 절대 권력을 행사한 최충헌의 아들 최우의 집에서 당대의 명사와 일류시인들을 청하여 시를 읊게 하였다. 이 자리에 이규보도 부름을 받아 선배 문사인 이인로, 함순, 이담지 등과 더불어 시를 짓게 되었다. 사실 최우는 그간 여러 문신들의 천거도 있고, 들어온 이규보의 명성을 생각하며 그를 발탁할 의사가 있었으므로 그의 재능을 시험해 보고자 한 자리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첫 관직생활도 길게 지속되지는 못하였다. 규보에게 주어진 생활은 詩作 활동뿐이었다. 이 때에는 어느 해보다 많은 작품을 창작하였다. 하지만 이 같은 고통스런 삶의 극한점에 이르자 그는 당시의 고관, 재상들에게 구관(求官)의 소청을 글로 올렸다. 그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문학적 역량뿐이었다. 마침내 이규보가 40세 되던 해, 과거에 급제한 지 18년 만에 직한림원(直翰林院)에 제수되었다. 이후 최충헌·최우 부자가 중용하였다. 최상의 후원자를 얻은 이규보로서는 이제 더 이상 관직과 승진에 초조해 할 필요가 없었다. 그 후 그는 출사 이후 치사(致仕), 임종까지 최씨 정권이 안고 있었던 당시의 국내외적인 시련과 난제를 극복하는데 있어 최일선에서 활약하였다. 이규보의 벼슬은 날로 올랐다. 그러나 벼슬이 오를 때마다 양사표(讓謝表)를 지어 올려 벼슬에서 물러나게 해 주기를 임금에게 청했다. 하지만 그의 붓을, 그의 문학적 재능을 아끼는 임금은 그를 쉽게 벼슬에서 놓아 주지 않았다. 57세에는 사마시를 주관하여 인재를 발탁하는 직위에 오르게 된다. 64세가 되어 그는 다시금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그해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았고, 이 때 그는 특별한 직책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으나, 몽고에게 통하는 서표와 문첩은 모두 다 그에게 위촉되었다. 즉, 그의 높은 문학적 재능은 언제 어디서나 국가의 쓰임을 받았으며, 이는 규보 본인 스스로 원하는 이문화국의 뜻을 실현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70세에 칙명을 받들어 <동궁비주시애책>을 지었고, 다시 간절한 걸퇴표를 올렸다. 드디어 12월에 ‘금자광록대부 수태보문하시랑평장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판예부사 한림원사 태자대보’란 직책으로 치사(致仕)하였지만 국가의 중요한 문서제작은 모두 그의 몫이었고 벼슬에서 물러난 이해에도 그는 칙명을 받들어 대장경각판에 대한 군신기고문을 지었다. <상몽고황제표장>, <송진경당고관인서>를 지었고, 72세 때는 <상몽고황제표장>등을 짓는 등 몽고와의 왕래 서·표를 전담하였다. 국가의 존망이 목전에 있는 중요한 시기에 이규보는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통해 나라를 빛내고 또한 위기에서 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74세(고려 고종 28년)세 되는 해 9월 2일 운명하였다. 평생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갈고 닦아 꽃피운 인생이었다.

이규보는 평생 시를 놓지 않았다. 높은 관직에 올라서도 혹은 귀양을 가거나 불우한 처지에 놓여 있을 때도 결코 시를 멀리 두지 않았다. 이규보는 이런 자신이 시마에 붙들려 있다며 자신의 천품을 인정하고, 다양한 방법을 통해 자신의 문학관과 문학사상을 드러냈다. 한편 이규보는 문학이 증언이기도 해야 한다는 문학사상을 견지하고 있었다. 역사가는 현실적인 사실만을 기록하여 증언한다면, 문학인은 현실적인 사실의 기록 이상의 재해석된 기록을 남기는 존재라는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비현실적 사적까지도 시인은 사실 이상의 진실로 증언할 수 있다. 또 이규보는 현실의 모순을 직시하고, 그 어려움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당대 고려사회의 어지러운 사회상과 기아에 허덕이는 농민, 농촌의 비참한 실정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당대 현실을 ‘증언’하고 있다. 이규보는 신흥 사대부 계층이다. 신흥 사대부는 유학을 자신들의 기본 사상으로 삼아 고려말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였고, 뒤이은 조선 건국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 계층이다. 그는 유교적 현실관을 견지했으므로 관직에 올라서 치국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현실적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 같은 소망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는 천부적인 재능에다 후천적인 수련으로 문학적 명성을 떨치고자 하였다. 그의 가문은 한미하였고, 시대는 문인의 수난기가 새로운 고비로 접어든 때였다. 이규보가 세상에 들고 나설 수 있는 무기는 오직 문학적 역량이었다. 이규보가 산 시대는 정권의 주체가 종래의 귀족층으로부터 새로이 대두된 신흥 사대부 계층으로 옮겨지는 일대 전환기로 관료층의 성격이 크게 변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국면을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이규보다. 이들 신흥 사대부들의 특성은 향리 출신으로 학문적인 교양과 문학적 실력을 바탕으로 하여 과거시험을 거쳐 중앙의 정치 무대로 진출한 학자적 관료군이라는 점이다. 이규보는 자신의 이러한 출신성분에 대한 철저한 자각에서, 출사하여 재상의 지위에 오른 뒤에도 항상 그의 문장으로 이바지하여 국가를 빛내야 한다는 사명감을 굳게 간직하였고 또 실제로 그 역할을 다하였다.


이규보의 국가·민족에 대한 의식은 그가 스스로 쓴 <동명왕편>의 창작 동기에서 밝혀 두었듯이, <동명왕편>은 단순한 설화적 관심과 흥미에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기원이 유구하고 또한 우월한 민족이라는 점을 확신하는 민족적 자부심과 그에 대한 욕구에서 출발하였다는 점에서 잘 나타난다. 이규보는 유자(儒者)로서 관직에 있으면서 백성을 올바로 다스려야만 한다는 사명감에서 특히 민중들의 삶의 현실과 조건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드러냈다. 앞에서 지적한 몇 가지 작품에서처럼 이미 이규보는 어지러운 사회 형편과 기아, 수탈 현상을 직시하였다.


一粒一粒安可輕 한 알 한 알을 어찌 가벼이 여길 건가

係人生死與富貧 생사, 빈부가 여기에 달렸는데

我敬農夫與敬佛 나는 부처처럼 농부를 공경하노니

佛猶難活已飢人 부처도 못 살리는 굶주린 사람 농부만은 살리네

可喜白首翁 기쁘다! 늙은 이내 몸

又見今年稻穀新 또 다시 금년 햅쌀 보게 되니

雖死無所歉 죽더라도 부족할 것 없네

農作餘膏此身 농사에서 오는 혜택 내게까지 미침에랴


이 시는 <신곡행(新穀行)>으로 인간의 생사 빈부가 모두 농민이 생산하는 곡식 한 알 한 알에 달려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작은 시 한편을 통해서 어려운 상황에서도 끼니를 이을 수 있는 자신의 처지를 감사함은 물론이거니와 이러한 감사를 통해 역설적으로 농민들의 비참한 삶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고려는 몽고군의 내침과 그 잔악한 만행으로 피폐해 있었다. 이규보의 시가 이러한 모습을 놓치고 지나갈 리 없었다.


歲儉民幾死 흉년으로 백성은 거의 죽게 되어

唯殘骨與皮 오직 뼈와 가죽만 남았는데

身中餘幾肉 몸에 남은 살 몇 점까지도

屠割欲無遺 남김없이 베어 가려는구나

君看飮河鼴 그대는 보는가. 두더지가 하수를 마신들

不過滿其腹 제 배만 채우면 그뿐인데

問汝將幾口 묻노니 네놈은 입이 몇이나 되길래

貪喫蒼生肉 백성의 살점을 모두 먹으려 드는가


이규보는 수탈하는 관리(贓吏)의 포악상과 그로 말미암아 다 죽게 된 민생을 개탄하면서 장피죄(贓被罪)로 잡힌 군수를 증오하고 있다. 이규보는 고위 관직에 오르고 노년이 되어 백성들을 보살피는 기본적인 소임이 중요함을 다시금 깨닫고, 누구보다도 민중과 민생에 대한 관심과 우려를 가지고 당대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시야우작(是夜又作)>에서는 하늘이 낸 백성들을 구제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如我合爲飢死鬼 나 같은 사람은 굶어죽은 귀신 되어도 마땅하리

無功食祿幾多年 공도 없이 몇 해나 나라의 녹을 먹었던가

蒼生盡是天之物 저 백성 모두가 하늘이 내셨거늘

何忍綜合溝壑塡 차마 그들을 구렁텅이에 빠지게 하랴


이규보는 유자적인 관점에서 국가와 민족, 그리고 사회와 민중을 생각하였다고 볼 수 있다. 문인 백운거사 이규보의 고도의 전문성을 확인할 수 있는 문장을 『동국이상국집』에서 찾아봤다.


"어려운 글자를 쓰기 좋아해서 남을 쉽게 현혹하려 했다면

이것은 함정을 파놓고 장님을 인도하는 체격이다.

사연은 순탄하지 못하면서 끌어다 쓰기를 일삼는다면

이것은 강제로 남을 내게 따르게 하려는 체격이다.

속된 말을 많이 쓴다면

이것은 시골 첨지가 모여 이야기하는 체격이다.

기피해야 할 말을 함부로 쓰기를 좋아한다면

이것은 존귀를 침범하는 체격이다.

사설이 어수선한대로 두고 다듬지 않았다면

이것은 잡초가 밭에 우거진 체격이니,

이런 마땅치 못한 체격을 다 벗어난 뒤에야

정말 더불어 시를 말할 수 있다.

남이 내 시의 병을 말해 주는 이가 있으면 기쁜 일이다.

그 말이 옳으면 따를 것이고 옳지 않아도 내 생각대로 하면 그만인데,

하필 듣기 싫어해서 마치 임금이 간함을 거부하여 제 잘못을 모르듯이 하리요.

무릇 시를 지었다면 반복해서 읽어보되,

내가 지은 것으로 보지 말고,

다른 사람 또는 평생에 제일 미워하던 사람의 작품처럼 여겨

덜되고 잘못된 것을 찾아보아서 찾을 수 없을 때 내놓아 발표할 것이다"





3-9. 이제현(李齊賢, 1287년~1367년)


○ 성장과정


경주 사람으로 1287년 12월에 출생하였다. 증조는 得堅, 조부는 핵(翮), 아버지는 검교정승(檢校政丞) 진(瑱)이다. 이제현은 모두 세 번 장가들었다. 15세(1301년)에 성균시(成均試)에서 장원을 한데 이어 (文科)에 급제하였다.


○ 관직생활

17세에 권무봉선고판관(權務奉先庫判官) 연경궁 녹사(延慶宮錄事)가 되었고, 22세에 예문춘추관(藝問椿秋館)에 등용되어 제안부직강(齊安府直講)을 지냈다. 23세에는 사헌규정(司憲糾正), 24세에는 선부산랑(選部散郞), 25세에는 전교사승 (典交寺丞) 삼사판관(三司判官)을 역임하였다. 26세에는 서해도 안렴사(西海道安廉使) 로 나갔다가 성균 악정(成均樂正) 풍저창사(豊儲倉使)를 지냈고, 27세에는 내부부령(內府副令) 풍저감두곡(豊儲監斗斛)을 역임하였으며, 28세에는 백이정의 문하에서 정주학(程朱學)을 공부, 원나라에 있던 충선왕이 만권당 (萬卷堂)을 세워 그를 불러들이자 연경(燕京)에 가서 원나라 학자 요수염(姚燧閻) 조맹부(趙孟俯)등과 함께 고전을 연구하였으며, 29세에는 선부의랑(選部議郞), 성균제주(成均祭酒)가 되었다. 30세에는 진현관제학 (進賢館提學)에 승진하였다.

31세(1317년)에는 선부전서(選部典書)로 원나라에 가서 상왕의 생일을 축하하였고, 32세에는 충선왕을 수행하여 중국 강남지방을 유람하였으며, 33세에는 지밀직사(知密直事)에 올라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이 되었으며, 원나라에 갔다가 충선왕이 빠이앤투그스(伯顔梵吉思)의 모함을 받고 유배되자 그 부당함을 원나라에 밝혀 1323년 풀려나오게 했다. 37세에는 광정대부 밀직사사(匡靖大夫密直使사)에 승진하고, 38세에는 추성양절공신 (推誠亮節功臣)이 되었고, 39세에는 삼중대광 영예 문관사에 올랐다.

42세(1339년)에 심왕(瀋王) 고(暠)가 모역(謀逆)하다 실패하자 원나라에 충숙왕을 모함, 원사(元使) 두린(頭麟)등이 왕을 잡아가자, 이때 연경에 가 사실을 해명하고 이듬해 귀국하여 시골에 은거하였다. 46세에 원나라 사신이 왕을 포박해 가므로 글을 올려 사면을 요청, 이듬해 판삼사사(判三司事)에 복직, 서연관(書筵官)이 되었다.


51세(1348년)에 충목왕이 죽자 제조경사도감으로 원나라에 가 충정왕의 승습을 요청하였고, 54세에는 공민왕이 즉위하여 우정승 권단정동 성사로 발탁,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지냈고, 55세에는 동덕협의찬화공신에 올랐다. 56세에 사직하였는데, 57세에 우정승에 재임하고, 59세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가 사직하고 저술과 학문 연구에 전심하였다.

만년에 은퇴한 후에도 왕명으로 실록을 편찬했다. 당대의 명문장가로 외교문서에 뛰어났고, 정주학의 기초를 확립했으며, 원나라 조맹부의 서체(書體)를 고려에 도입하여 널리 유행시켰다.「익재난고(益齋亂藁)」 소악부(小樂府)에 17수의 고려의 민간 가요를 한시(漢詩) 칠언절구로 번역하여 이것이 오늘날 고려가요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공민왕 묘정(廟庭)에 배향(配享), 경주(慶州)의 귀강서원(龜岡書院),금천(金川)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원나라 진감여(陳鑑如)가 그의 초상화를 그리고 탕병용(湯炳龍)이 찬(贊)을 썼는데, 그 필적과 그림이 국보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미술관에 보관되고 있다. 묘지명에 따르면 이제현은 1301년(충렬왕 27)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료 생활을 시작한 이래 공민왕대까지 활동하였다. 이제현은 충정왕 때를 제외하고 국가의 중요한 외교문서와 문장을 전담하여 작성하였으며, 특히 충선왕 때 충선왕이 원나라 수도에 설치한 만권당에서 원나라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고려에 성리학을 수용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충선왕을 수행하여 중국 강남지방을 여행하면서 많은 문장을 남겼다. 또한 충목왕과 공민왕 때 역사 편찬에 참여했으며, 충혜왕 때 『역옹패설(櫟翁稗說)』을 편찬하였다. 또한 여러 번 과거를 주관하여 수많은 문생을 배출하였다. 저술로 현존하는 것은 <익재난고(益齋亂藁)> 10권과 <역옹패설(櫟翁稗說)> 2권이다. 흔히 이것을 합해 <익재집(益齋集)>이라 한다.




○ 평가: 동아시아 지식인들에게 고른 사랑을 받은 문인


이제현은 동아시아 지식인들에게 두루 사랑받았다. 북경의 만권당에서 한족 학자들과 널리 어울리며 글을 썼으며, 고려의 대변인으로 다섯 차례나 중국을 오가면서 수많은 시를 남겼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백성들이 부르던 사리화, 거사련, 처용가 같은 노래를 기록으로 남겼으며, 기이한 이야기와 시화를 모아 《역옹패설》을 엮었다. 이를 통해, 고려 말의 혼란기를 조국에 대한 애정으로 살아냈던 한 지식인의 내면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현은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고려의 신하로 살면서 고려 정부의 대변인 역할을 했던 사람이다. 중국 곳곳의 이름난 곳을 찾아다니며 시를 읊고, 역사 속 인물의 고사를 두루 소재로 삼아 시를 써서 중국 문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원나라에 있으면서도 늘 고려를 그리워해서 중국 사람이 아니면 지을 수 없는 장단구 형식으로 ‘송도팔경’ 따위 시를 지어 고려의 산수를 널리 알리기도 했다. 금강산을 노래한 시를 남긴 것도 같은 뜻에서였다. 이제현은 중국 대륙을 두루 다니고 명승을 탐방할수록 고려를 더욱 그리워하여, “말과 수레 오고가는 함곡관 길에 / 몰아오는 먼지가 옷깃에 쌓이누나. / 이 세상 반쯤이나 두루 돌아다녔어도 / 마음은 물길 따라 고국으로 향하누나.” 하고 노래할 수밖에 없었다. 기울어가는 나라를 걱정하며 “미리 막지 못한 환란 부끄럽도다. 나라 운명 붙드노라 머리만 세었어라” 하고 노래한 ‘황토점에서’, “예로부터 사나운 탐욕 어질고 지혜로운 이를 가려 버리는가” 하고 탄식한 ‘비간의 묘’ 나 ‘명이의 노래’, ‘예양교’ 들도 유명하다.

이제현은 민간에서 부르던 노래에 깊은 관심을 가져 ‘소악부 9수’와 ‘후소악부 2수’를 기록으로 남겼다. 고려 문학을 올바로 인식하고 새롭게 발전시켜 나가려는 시도의 하나로 소악부를 한시로 옮겨 적은 것이다. 이제현은 무신 정권이 끼친 해악을 극복하는 것과 나라의 자주성을 지키고 키워 나가는 일을 고민하는 한편, 고려 문학을 역사적인 시기에 따라 논하고, 새로운 문학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 심각하게 살폈다. 그 가운데 “요 못된 참새야 너 어디를 싸다니누. 한 해 농사 어떤 건지 모르고 / 늙은 홀아비 홀로 가꾼 밭인데 / 조며 기장이며 다 까먹어 치우누나.” 하고 노래한 ‘사리화’는 고된 부역과 가렴잡세, 권력자들의 약탈을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부르던 노래다. 위정자들을 비판하는 노래를, 기록하여 역사에 보존케 한 데서 이제현의 진보성과 애민 정신을 볼 수 있다.

이제현은 원나라의 이름난 문인들과 깊이 교류하고, 여러 임금을 섬기면서 고려가 자주성을 가지도록 노력하는 동시에, 문학을 통한 외교에 큰 공을 세웠다. 충선왕이 귀양을 갔을 때는 원나라 조정에, 품위를 갖추고 이치에 맞는 표문을 보내 고려 왕의 지위를 튼튼하게 했다. 이제현이 중국 문학의 한 형식인 사(또는 장단구)를 자유롭게 창작하면서 문학적 역량을 일찍부터 인정받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현의 《익재집》이 한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도 거듭 출간되고, 중국인의 저술에 자주 인용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이제현은 1353년 관직에서 은퇴할 결심을 하였지만 왕명에 따라 바로 그만 두지 못하고 3년 후 비로소 저술과 학문 연구에 전심하게 된다. 은퇴 후의 이제현의 활동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그의 만년의 작품이라고 알려진 『역옹패설』을 통해 왕성한 은퇴 후 활동을 읽을 수 있다. 『역옹패설』은 1342년(충혜왕 복위 3) 56세에 환로(宦路)에서 은퇴하여 자기 집에 거처하면서 저술한 책이다. 고려시대에 이 책이 간행되었을 것이나 전하는 것이 없고, 다만 현재 온전한 모습으로 열람할 수 있는 것으로는 1814년(순조 14) 경주에 거주하는 후손들에 의하여 간행된 《익재난고 益齋亂藁》에 붙어 있는 것이 있다. 이 책의 체재는 전집 · 후집으로 나누어 각 집이 다시 1 · 2권으로 되어 있어, 모두 합하면 4권이 되는 셈이다. 전집에는 저자 자신의 서문이 있고, 권1 · 2에 역사 · 인물일화(人物逸話) · 골계(滑稽) 등이 있다. 후집에는 저자 자신의 서문과 권1 · 2에 시화와 세태담(世態談)이 있다. 이 책에 나타난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제현은 고려가 몽고, 즉 원나라로부터 치욕을 당한 것에 대해 반성하는 한 방법으로 부당한 사대주의에 저항하고 있다. 전집 권1에서 그는 조정의 중신이 몽고어를 능숙히 구사할 줄 아는 역관 출신이라 해도 공식석상인 합좌소(合坐所)에서 역관의 통역도 없이 직접 몽고어로 원나라의 사신과 대화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민족 자존의 필요성을 깨닫고 있었던 그의 주체적 자세를 반영한 것이다. 둘째, 그는 전통성, 즉 민심의 기반이 없는 위조(僞朝)에서의 영화로운 생활을 비판하고 있다. 이는 이 책에서 삼별초정권을 부정적 입장으로 보아 위조라고 생각한 것에 기인한다. 즉 삼별초가 고려의 백성들을 협박하고 부녀를 강제로 이끌어 진도에서 비상정부를 구축하였으므로 민심을 거역한 위조라 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정문감(鄭文鑑)이 삼별초정부에서 승선이 되어 국정을 맡게 되자, 위조에서의 부귀보다 죽음으로써 몸을 깨끗이 지키고자 하였던 행위를 마땅한 일이라 생각한 것이다. 셋째, 무신정권의 전횡을 폭로하고 그 폐단을 고발하고 있다. 이제현은 오언절구의 시를 인용하여 주먹바람[拳風], 즉 무신의 완력이 의정부를 장악하는 공포정치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나타낸다. 이러한 현실인식 태도는 무인정권의 폐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게 한 것 같다. 그는 예전에는 우리나라의 문물이 중국에 필적할 만큼 융성하였으나, 근래에 산중에 가서 장구(章句)나 익히는 조충전각(雕蟲篆刻 : 수식을 일삼는 것)의 무리가 많은 반면 경명행수(經明行修 : 경전공부와 심신수련)를 하는 사람의 수효가 적게 된 이유를 바로 무신의 난에서 찾고 있다. 곧 학자들이 거의 다 무신의 난이 일어나자 생명의 보존을 위하여 깊은 산으로 찾아들어 중이 되는 이가 많았다. 그래서 문풍(文風)이 진작되는 시점에 오게 되어도 학생들이 글을 배울만한 스승이 없어 도피한 학자였던 중들을 찾아 산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같은 지적은 무신집권기가 초래한 반문화적 폐해를 단적으로 밝혀준 좋은 예일 것이다. 넷째, 이 책에는 고려 말기 문학론에 있어서, 용사론(用事論)과 신의론(新意論)의 현황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이제현은 한유(韓愈) · 이백(李白) 등의 당대(唐代) 시인들을 비롯한 유명한 중국 문인들의 시를 거론하기도 하고, 정지상(鄭知常)을 비롯한 우리나라 시인들도 거의 망라해서 그들의 시에 대한 평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극단적인 배척이나 악평은 삼갔다. 용사에 있어서는 이치에 맞지 않는 단어의 사용은 권장할만한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지명의 사용도 실제정황과 일치하지 못할 경우에는 호된 비판을 가하였다. 이러한 그의 비평태도는 시어의 현실성을 강조하였다는 측면에서 특기할만한 것이다. 아울러 이제현의 말년 생활의 왕성한 면모를 확인할 수 있으며, 파란만장했던 지나간 세월을 돌아보며 관조하면서 자신의 의지와 고려의 시대상을 반영하려는 한 인간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역옹패설』은 이제현이 관계(官界)에서 은퇴한 후 한가함과 답답함을 달래기 위해 벗들과 오고간 편지 조각들을 이어 붙이고 그 종이 뒷면에 붓 가는대로 기록하여 '역옹패설'이라 이름 지은 데서 유래한다. 오늘 날에도 '패관문학' 의 압권이며 우리 고전 수필 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역옹패설」은 역사, 인물 일화(人物逸話), 골계담(骨稽談), 시화(詩話), 세태담(世態談) 등을 포함하고 있어 당대의 현실 문학 세계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4. 요약 및 결론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면 표3과 같다.


<표3> 성장과정, 직업경로 및 평가


구분
성장과정
직업경로
평가

이황

(1501~

1570)

- 대대로 벼슬하는 집안에서 출생

- 생후 7개월에 부친상, 이웃노인· 숙부에게서 수학

- 14세에 도연명 의 시 애독, 19- 20세에 성리대전, 주역을 읽을 만큼 뛰어나고 침식을 잊을 정도로 열중

- 23세에 성균관 에 입학
- 34세, 과거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종9품/사대교린문서 담당)

- 39세, 홍문관 수찬(정6품/도서관리 및 임금에 자문)

- 42세, 홍문관 부교리(종5품)

- 43세, 성균관 사성(종3품)

- 48세, 단양→풍기군수(종4품)

- 52세, 성균관 대사성(정3품)

- 58세, 공조참판(종2품)

- 68세, 홍문관 제학(종2품) → 대제학(정2품)
-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중하였고, 관직은 늦게 시작하였으며, 벼슬을 주면 사양하고, 사퇴하면 또 벼슬을 주는 것이 빈번하게 반복되었으며, 뛰어난 학문적 경지를 이룸

- 60세부터 도산서당을 짓고 독서, 수양, 저술 및 제자훈도에 전념

- 68세에 대제학을 맡고, 70세에 세상을 떠나기 한해 전에도 이조판서를 명받고 사양할 정도로 뛰어난 인재

- 53세이후 수많은 저술과 강의(주자서절요, 자성록, 고경중마방, 사단칠정론, 심경후론, 전습록논변, 무진육조소, 성학십도 등)에 정진하는 한편, 청빈한 구도자로서 지극히 인간적인 삶을 살아 한·중·일 3국의 도의철학의 건설자이자 실천자로 평가됨

김춘추

(602∼

661)
- 진골신분인 이찬(2등급)의 아들로 출생
- 41세, 대야성 함락으로 사위(김품석)부부가 죽자 충격

- 46세, 비담의 반란 제압, 백제 외곽세력 견제차원에서 일본 건너감

- 47세, 당으로 건너가 친당정책 추진

- 49세, 내정개혁

- 53세, 왕으로 즉위

- 54세, 왕권 등 권력기반 강화

- 57세, 직계친족 지배체제 구축

- 59세, 김유신을 상대등으로 임명, 왕권의 전제화

- 60세, 사망
- 늦게 왕위에 올랐으나, 가야성 함락시부터 백제멸망이라는 국가적 아젠다를 제시하였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리딩그룹(김유신 확보, 차별받던 가야계 결합 등)을 구축해나가는 전략적 사고와 실천력이 있었음

- 나아가, 고구려 군사지원 획득에 실패하자, 실망은커녕 오히려 ‘백제 멸망'보다 더 큰 국가비전으로서 ‘삼국통일’을 제시하였고 이를 위해서는 신라 지배세력의 교체가 절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내정개혁을 추진하여 아들(문무왕)이 삼국통일을 완성하는 기초를 마련(최고의 헌사인 태종이란 시호를 받음)

허준

(1539~

1615)
- 용천부사를 역임한 허론의 서자로 출생

-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특히 의학에 뛰어나 지역사회의 의원역할

- 서자출신이라 문과진출이 불가하여 잡과인 의과로 진출
- 31세, 유희춘이 (허준의 뛰어남을 인정) 이조판서에게 내의원직 천거

- 33세, 내의첨정(종4품)

- 35세, 내의정(정3품)

- 37세, 내의원(왕족 및 대신의 치료를 담당하던 국가최고의료기관)에서 근무 시작

- 43세, 왕명으로 ‘맥경’ 출간

- 52세, 왕자(후일 광해군) 치료로 가자(정3품이상 품계)를 명받음

- 54세, 선조 피난시 의주까지 수행(공로인정, 종1품 승록대부가 됨)

- 58세, 의방신서 편찬시작

- 62세, 수의가 됨

- 63세, 언해두창방, 언해태산집요 편찬

- 72세, 동의보감 25권 완성(15년 연구 결과)

- 77세, 사망(정1품 추증)
-서자출신으로 잡과로 종1품까지 진출한 유례없는 성공을 거둔 조선의학사에서 독보적 인물

- 한의학·궁궐·민간의술은 물론 교육에 기여

- 동의보감은 중국에서도 30여차례 출간될 정도로 빼어난 종합의서로 동아시아 의학사에 크게 기여

- 의술을 학문적 경지(철학수준)로 끌어올렸고, 나아가 주체성 있는 학문(신토불이 이론)으로 정착시킴

장영실

(?~ ?)

- 동래현 관기의 아들로 출생(1383년경으로 추정, 부친·출생·사망시기도 모르나, 고려말 충신인데 역적으로 몰린 것으로 추정)

- 어릴 때부터 매우 치밀한 두뇌, 뛰어난 관찰력, 기계원리 파악에 남다른 재주 보유
- 1400(17세 추정), 동래현감 추천으로 입궐

- 1423년(40세 추정), 세종의 특명으로 면천, 상의원 별좌(정5품)임명

- 1432, 목간의 완성

- 1433, 혼천의(천체위치측정) 완성, 호군(정4품)

- 1434, 앙부일구(해시계), 자격루(자동 물시계) 제작

- 1437, 간의(별 움직임 관측) 완성

- 1438, 옥루 제작

- 1441, 측우기 제작, 수표발명, 그 공으로 상호군(정3품)에 오름
- 신분상 천민으로 출발하지만, 타고난 재능과 성실성을 인정받아 세종의 특명으로 면천하면서 벼슬도 받게 됨

- 조선 최고의 과학자로 평가 받는 바, 대대적인 천문·기상의기를 제작(천문관측기구인 간의 및 혼천의, 자동물시계인 자격루, 해시계인 앙부일구, 세계 최초의 측우기 등)하였고, 영국 도날드 힐 박사로부터 15세기 최고의 기계기술자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왕실 최고의 기계工匠이었음

- 그런 의미에서 자격루가 복원되어 ‘07.11.28부터 일반에 공개되는 것은 매우 큰 상징적 의미가 있음

맹사성

(1360~

1438)
- 1360년, 송도에서 출생(조부는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고려멸망시 순절, 부친은 후진양성에만 힘쓰면서도 아들의 벼슬길은 허용)

- 1370, 모친상을 당하여 이를 극진히 치러 효자문이 세워짐
- 27세, 문과급제, 춘추관검열(정9품), 사인, 우헌납, 내사사인(정4품)

- 41세, 간의우산기상시(정3품), 간의좌산기상시(정3품)

- 44세, 좌사간대부

- 46세, 동부대언(정3품)

- 47세, 좌부대언(정3품), 이조참의(정3품)

- 48세, 예문관제학(종2품)

- 49세, 대사헌(종2품)

- 52세, 판충주목사

- 53세, 풍해도도관찰사

- 57세, 예조판서(정2품)

- 58세, 호조판서, 충청도도관찰사

- 59세, 공조판서

- 60세, 이조판서, 예문관대제학(정2품) 겸임

- 62세, 의정부 찬성사(정2품)

- 66세, 좌군도총제부판사

- 68세, 우의정(정1품)

- 72세, 춘추관영사/좌의정(정1품)
- 음악에 대한 높은 경륜과, 문화와 전통을 바라보는 유연하고 참신한 사고를 겸비한 세종 시대 최고의 지성으로 태조부터 세종까지 여러 임금들이 무슨 일이든 맹사성과 의논하고 그에게 자문했으며, 신진 관리들이 상소를 올리면 임금은 “맹사성과 의논하라”는 말을 할 정도였음.

- 발상의 전환 내지 유연한 사고의 소유자로서 타고난 문화전략가였으니, 당시 아악위주의 사회에서 ‘전통과 제도는 변화하는 것이므로 이론과 명분보다는 필요에 따라 수정 보완하는 것’이라며, “먼저 아악을 연주하고 향악을 겸하여 쓰는 것이 좋겠다”는 아악·향악 겸용론을 제안하였음.

- 행태면에서도 매우 첨렴결백하고 효성이 지극하였음.

계백

(? ~

660)
- 성장과정에 관한 기록이 없음

- 다만,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김유신(595~673), 연개소문(?~666), 성충(605~656) 등과출생연도가 비슷할 것으로 추측
- 660년에 나당연합군이 공격해 올 때, 5천 결사대를 이끌고 전투에 나서기 전 가족을 모두 죽이고 결사항전하여 4차례 전쟁에 모두 이기나, 신라 화랑 관창 등의 죽음을 계기로 결국은 백제가 패하고 계백도 전사
- 당시 백제가 망하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이라는 판단과 장수가 되어 내 집과 내 몸을 잊은 뒤라야 士卒들의 죽을 결심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에, 자신의 처자가 욕을 당하지 않도록 몸소 죽이고, 자신도 싸우다가 죽은 그 뜻과 절개를 높이 평가할 수 있음.

- 더구나, 백제가 망할 때 홀로 절개를 지킨 점은 가히 “나라와 더불어 죽는 자”라고 칭송함에 부족함이 없다. 그래서 계백의 이러한 투철한 국가관은 후대인들의 높은 칭송의 대상이 되었고, 계백은 충절의 표본으로 여겨짐.

정약용

(1762~

1836)
- 4세에 천자문을 배우고 7세에 시를 짓는 등 명석함

- 9세에 모친상

- 10세에 경서와 사서를 수학, 지은 글이 키만큼 됨

- 16세에 이익의 유고를 사숙, 감명

- 22세 성균관에 들어감

- 23세, 중용강의 80여항목을 바쳤는데 정조가 감탄
- 28세, 희롱직장(종7품), 초계문신, 부사정, 가주서에 제수되고 舟橋를 만듬

- 29세, 예문관 검열(정9품), 사간원 정언(정6품), 사헌부 지평(정5품)

- 31세, 홍문관 수찬(정6품), 수원성 규제 및 기중가도설을 지어올림

- 33세, 성균관 직강(정5품), 홍문관 교리·수찬

- 34세, 사간원 사간(종3품), 병조참의(정3품)

- 35세, 규영부 교서, 병조참지(정3품)

- 36세, 곡산부사

- 38세, 형조참의

- 40세 하옥되어 장기로 유배,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투옥되었다가 강진으로 유배(18년)

- 42세 이후 60세까지 수많은 저술활동 전개(아방강역고, 논어고금주, 대동수경,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

- 75세, 사망
- 18년간의 유배생활을 통해 조선사회의 현실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여러 사상과 학문을 검토하여, 조선후기의 실학사상을 집대성함. 그의 학문체계는 유형원과 이익의 주류를 계승하면서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 북학파의 사상도 흡수하였고 이기론에 있어서 이황과 이이의 학설을 종합하였음.

- 기술관료로서도 화성 축조시 기중기 설계, 한강도하를 위한 주교의 설치 등은 공로가 큼.

- 그는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서 암행어사도 해 보고, 정조의 총애를 받기도 하나 기독교와 서학에 빠져 있다는 이유로 공격을 받고 유배당하는 등 정치적으로 처절한 패배자였음.

- 식견과 경륜을 펴지 못한 채 패가망신의 아픔을 삭이는 긴긴 세월 忍苦의 나날이 그를 ‘한자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대학자’로 끌어올렸으며, 오히려 너무 오랜 시간 붓으로 저작을 계속해 어깨 통증에 시달릴 정도였고, 편지뿐 아니라 牧民心書를 비롯한 불후의 저작에 혼신의 힘을 쏟았음.

이규보

(1168~1241)
- 10세에 중국고전들을 읽을 정도로 문재가 뛰어남

- 15세에 시를 빨리지어 走筆 李唐白이라 불림

- 22세, 사마시 수석합격

- 23세, 문과 급제
- 32세, 전주사록(정8품)

- 35세, 병마녹사겸 수제

- 40세, 권보직한림

- 45세, 천우위녹사참군사(정7품), 사재승

- 48세, 우정언(종6품), 좌·우사간(정6품)

- 53세, 예부 낭중(정5품), 한림 시강학사(정4품)

- 60세, 위위시판사(3품)

- 64세, 산관, 대몽고 국서 담당

- 65세, 비서성판사

- 66세, 우산기상시보문각학사, 호부상서집현전대학사판예부사

- 68세, 판호부사 태자대보

- 70세, 문하시랑평장사(정2품)
- 어린시절부터 문학적 재능을 보인 고려의 대문호, 천재시인이면서도 자신의 영달보다는 국가적 요청에 부응해 나라를 빛내는 이른바 以文華國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고, 당대 무신 집정기의 사회적 모순과 민중의 비참한 실정을 문학과 정치를 통해 비판적으로 극복하려고 노력한 중세 지식인이었음

- 20대에 급제 후 8년간 보직을 못 받았던 시기에 오히려 정열적인 시문 창작을 했고, 40세 이후 중용되어 致仕·임종까지 최일선에서 활약하면서, 날로 벼슬이 올랐으나 그 때마다 양사표(讓謝表)를 올려 사직을 청했지만 그의 문학적 재능을 아끼는 임금은 쉽게 벼슬에서 놓아 주지 않았음.

- 70세에 致仕하였지만 국가의 중요한 문서제작은 모두 그의 몫이었음.

- 그는 儒者로서 관직에 있는 중 민중들의 삶의 현실과 조건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고 어지러운 사회 형편과 기아, 수탈 현상을 직시하였음.

이제현

(1287~

1367)
15세에 성균시 장원, 문과 급제
- 17세, 연경궁녹사

- 22세, 예문춘추관 제안부직강(종5품)

- 23세, 사헌규정

-24세, 선부산랑(정5품)

- 25세 전교사승 삼사판관

- 26세 서해도안무사, 성균악적 풍저창사

- 27세, 내부부령 풍저감두곡

- 28세 백이정 문하에서 정주학 수학

- 29세, 성균제주

- 30세, 진현관제학(정3품)

- 32세, 충선왕 중국행 수행

- 33세, 지밀직사(종2품)

- 39세, 삼중대광영예문관사

- 47세, 판삼사사 서역관

- 54세, 조첨의 정승(종1품)

- 57세, 우정승(정1품)

- 59세, 문하시중
- 원나라 지배하에서 고려 정부의 대변인 역할을 했고, 중국의 명소와 인물의 고사를 소재로 시를 써서 중국 문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음.

- 민간에서 부르던 노래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문학을 통한 외교에 큰 공을 세웠음.

- 70세에 관직을 떠나 저술과 학문 연구에 전심하는데, 만년의 작품 『역옹패설』을 통해 왕성한 은퇴 후 활동을 읽을 수 있으나 현존하지 않고, 후손들이 간행한 《익재난고 益齋亂藁》에 붙어 있는 것이 있는바; 이 책에 의하면 이제현은 부당한 사대주의에 대한 저항, 민심의 기반이 없는 僞朝 비판, 무신정권의 전횡·폐단 고발하고 있음.





이들은 대체로 국가관이 투철하고 청렴·근면하며 개척정신이 강하고 백성을 사랑하였다. 그리고, 오랜 관직 생활을 하면서 높은 벼슬에까지 오르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벼슬을 시작하는 시점은 표4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같은 조선시대를 비교해 보아도 맹사성·정약용은 20대 후반에, 이황·허준은 30대 초반에, 장영실은 40대로 다르다. 품계당 평균 승진기간도 이황은 34년만에 15등급(종9품에서 정2품)이 올라 평균 2년이 조금 넘고, 허준은 21년만에 6등급(종4품에서 종1품)이 올라 평균 3년 반이며, 장영실은 18년만에 4등급(정5품에서 정3품)이 올라 평균 4년 반이고, 맹사성은 41년간 16등급(정9품에서 정1품)이 올라 평균 2년 반이며, 정약용은 6년간 9등급(정9품에서 정3품)이 올라 평균 8개월이 소요되는 등 매우 다르다.


<표4> 관직활동 연령대 및 승진 품계

구분
관직활동 연령대
관직 품계

20대
30대
40대
50대
60대
70대
종9
정9
종8
정8
종7
정7
종6
정6
종5
정5
종4
정4
종3
정3
종2
정2
종1
정1

이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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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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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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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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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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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의 시사점으로는 먼저, 누구나 꿈을 가지고 각자의 능력을 최대한 키우며 지속적인 노력을 하면, 출신가문이나 관운의 유무, 기타 시대적 배경의 유·불리 등을 불문하고, 얼마든지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길이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둘째, 몇 몇 직업에서 유사한 삶을 살아가는 것보다는 각기 다른 분야에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개인의 성장은 물론 그 사회의 저변을 넓히는데 더욱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5. Key Word: 투철한 국가관, 개척정신, 청렴성, 성실성




6. 참고문헌

김병숙, 청소년의 진로대리학습을 위한 역사적 인물조사 및 진로대리학습모형, 2006, 한국직업교육학회

이병도 역주, 삼국사기(상, 하), 을유문화사, 2005, 권제1(기이), 권제5(신라본기 제5), 권제28(백제본기 제6), 권제47 (열전 제7)

이민수 옮김, 삼국유사, 을유문화사, 2002, 권제1(기이)

정인지외 지음, 고전연구실 옮김, 신편 고려사 9(열전2) 권제102 및 권제110, 신서원, 2001

국역 조선왕조실록(sillok.history.go.kr), 태종실록, 세종실록, 명종실록, 선조실록, 광해군일기, 인조실록, 숙종실록, 정조실록, 순조실록 등

최인호, 유림 3권, 열림원, 2005/ 유림 6권, 열림원, 2007

김 훈, 위인 모음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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