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 4일 일요일

역사적 인물의 직업경로 분석

(경기대학교 대학원 직업학과 박사과정 리포트)

역사적 인물의 직업경로 분석












과 목 명 : 직 업 학

담당교수 : 김 병 숙










학 과 : 일반대학원 직업학과

과 정 : 박사과정 2학기(학번 20071102029)

성 명 : 이 동 규




◇ 역사적 인물의 직업경로 분석




1. 문제의 제기 및 연구의 필요성

인간의 역사는 한 개인의 삶속에 일평생 일을 해야 살아갈 수 있다. 곧 직업을 통해 일정량의 소득을 가지고 개인의 삶을 영위할 수 있으며 가정을 이끌어갈 수 있다. 한 인간의 생애가 바로 “인생은 직업이다”라는 말로 귀결될 수 있는 것이다.

한 개인의 역사는 태어날 때부터 각자가 다른 인생이 존재하고 있다. 우선 먼저 부모로부터 가정의 친인척 및 지인을 통한 자연스러운 만남 속에 짧게는 몇 년부터 길게는 20여년 동안 습득되어지는 생활 속 정보를 통해 사회의 직업정보를 얻어 직업선택에 있어 우위 및 수월성을 가질 수 있으며 소수가 갖는 최고점의 이익의 위치에도 다다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직업선택 경로를 보면 각자의 적성·흥미·가치보다는 일반적으로 선호하는 몇몇 일류 직업에 종사해야만 성공한 것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획일적이고 잘못 인식된 직업관 때문에 그런 유형의 직업에 취업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치르고, 그 경쟁에서 실패한 많은 사람들은 다른 유형의 직업을 찾기보다는 사회를 비관하며 실업자의 위치로 남아 삶에 대한 의욕을 잃어 생을 비관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김병숙(2006)에 의하면, 이를 지원하는 방법의 하나로 우리 역사상 성공한 직업인을 모델링하는 방안이 제시되었다. 진로에 대한 직업정보를 어떻게 구해야할지 모를 뿐만 아니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모르는 대상자를 위한 프로그램『내인생 스승따라하기』(My Life Teacher Modeling Program; MLTMP)을 활용하여 자신의 진로에 맞는 길을 가고자 하는데 가르침을 줄 인물을 선정하여 인물이 추구한 진로목표, 노력, 방법, 직업관 등을 분석하여 자신에 맞는 진로목표, 노력, 방법, 직업관등에 대한 모델링을 설계할 수 있다. (자신의 진로를 개척할 때, 진로에 대한 용기를 잃을 때, 직업생활에서 적응이 어려울 때 도움이 필요한 사람, 앞으로 진로에 대한 자기관리를 철저히 하고자 하는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등을 대상으로 한다. 물론 일반인들도 가능하다.)


이 연구는 우리나라 역사적 인물이 갖는 직업적 경로에 대한 직업정보 개발의 한 과정으로서 청소년들이 성공한 직업인을 현실적으로 모델링할 수 있도록 삶을 통한 직업경로를 구체적으로 제시해 보는 데 그 목적이 있다.



2. 연구방법

문헌연구를 중심으로 2명 선정하여, 각 개인의 성장과정, 직업(관직)생활(업적),평가 순으로 분석하였다. 위인의 삶과 업적을 통한 직업경로를 제시하여 생애주기를 연구하여 제시하였다.

분석대상 인물

번호
구 분
대표적 인물

1
투철한 국가관의 자기희생적 인물(난국을 극복)
이순신

2
인간이 갖는 무한한 능력을 발휘
세종대왕






3. 직업경로 분석



3-1. 이순신(李舜臣)

①성장과정

이순신 (李舜臣, 자는 여해 汝諧)은 1545년(인종 1) 3월 8일 (양력 4월 28일)* 자시(子時, 밤 11시˜새벽 1시)에 당시의 한성부 건천동(乾川洞)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고려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덕수 이씨(德水李氏)의 1대 이돈수(李敦守)로부터 내려오는 11대손 정(貞)이며 평민생활을 하는 양반이었고, 어머니는 초계 변씨(草溪卞氏)였다. 어머니 변씨는 아들에 대한 사랑이 극진하면서도 가정교육에 엄격하였다.


이순신은 희신(羲臣), 요신(堯臣)을 두 형으로 두고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밑으로는 아우 우신(禹臣)이 있었다. 큰형 희신에는 네 조카 뇌(雷), 분(芬), 번(蕃) 그리고 완(莞)이 있었고, 작은형 요신에게는 두 조카 봉과 해가 있었으나, 두 형이 모두 먼저 사망하였기 때문에 이순신은 이들 여섯 조카를 돌보아야 했다. 그는 조카들에게 친자식과 같이 극진하였다고 한다. 이순신과 부인 상주방씨(尙州方氏)는 세 형제 회, 열, 면과 한 딸을 두었고, 서자(庶子)로는 두 형제 훈(薰)과 신(藎)은 무과에 올랐다. 부인 방씨(方氏)는 보성군수 진(震)의 딸인데, 이순신의 전몰 후 정경부인(貞敬夫人)의 품계에 올랐고, 80이 넘도록 살았다.


②관직생활

22세에 비로소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여 28세 되던 1572년(선조 5) 훈련원별과(訓鍊院別科)에 응시하였으나 말을 달리다 말이 넘어지며 낙마하여 왼쪽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어 등과에 실패하였다. 32세 되던 1576년(선조 9) 봄에 식년무과(式年武科) 출장하여 병과(丙科) 제4인으로 급제하였다. 등과 하고도 그해 12월에야 귀양지로 여기던 함경도 동구비보(董仇非堡)의 권관(權管)으로 부임, 35세 되던 1579년 2월 귀경하여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가 되었고, 같은 해 10월에는 충청병사의 막하 군관으로 전임되었다. 이듬해 36세가 되던 1580년 (선조 13) 7월에 발포(鉢浦) 수군만호(水軍萬戶)가 되었다. 이 무렵에 좌수사 성박(成 )이 객사 뜰의 오동나무를 베어다가 거문고를 만들려 하자, 관청 물건을 함부로 베어 갈 수 없다 하여 사람을 돌려보내니 수사가 크게 호통하였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38세, 1582년(선조 15) 1월 군기경차관(軍器敬差官) 서익(徐益)이 발포에 와서 군기를 보수하지 않았다고 무고하였기 때문에 파직(罷職) 되었다. - 이것이 이순신이 당하는 첫 번째 파직이었다. 같은 해 5월 다시 임명되어 훈련원 봉사가 되었다.

39세 1583년 (선조 16) 7월 함경남도 병사 이용의 막하 군관으로 전근, 10월에는 함경북도 건원보(乾原堡) 권관으로 오랑캐 토벌에 공을 세워 11월에 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이 되었다. 그러나 같은 달 15일 아산에서 부친이 별세하여 천리 길을 밤낮으로 달려 귀향, 성복하고 탈상까지 휴관(休官) 하였다.

42세, 1586년(선조 19) 1월 사복시주부(司僕侍主簿)에 임명되었으나 북방오랑캐들의 침입이 있자 16일만에 다시 함경도 조산보(造山堡) 병마만호(兵馬萬戶)로 천거되었다. 또 이듬해 8월에는 녹둔도(鹿屯島) 둔전관(屯田官)을 겸직하니, 섬이 외롭고 방비가 부실하여 누누이 중병을 청하였으나 병사 이일(李鎰)은 듣지 않았다. 오랑캐의 습격을 당하자 패군의 죄로 하옥, 무고된 이순신은 파직되고 백의종군(白衣從軍) 하였다. - 이것이 이순신이 당하는 두 번째 파직이었다.......

45세, 1589년(선조 22) 2월 전라순찰사 이광(李洸)의 군관이 되었고, 또 순찰사의 주청으로 조방장(助防將)을 이어, 11월에는 선전관도 겸직하게 되었으며, 12월에는 정읍(井邑)헌감이 되었다. 46세 되는 이듬해에는 고사리진(高沙理鎭)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또, 만포진(滿浦鎭)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에 임명되기도 하였으나, 모두 대간(臺諫)들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47세, 임진왜란의 발발 1년 전인 1591년(선조 24) 2월, 진도(珍島)군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 전에 다시 가리포진(加理浦鎭) 수군첨절제사에 임명, 또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좌도(全羅左道)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로 임명되어, 2월 13일 정읍을 떠나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 : 지금의 여수)에 부임하였다. 수사의 임명은 관철되었고, 추천자는 유성룡(柳成龍)이었다. 유성룡은 이미 이율곡(李栗谷)이 이조판서로 있을 당시 이순신의 이름을 소개한 바 있었으나, 이순신은 율곡이 자기와 성씨가 같은 문중이라 하여 그의 재직시에 찾아가기를 굳게 사양했다 한다.

이순신은 왜적의 내침을 염려하여 취임 후 바로 영내 각 진의 군비를 점검하는 한편, 후일 철갑선(鐵甲船)의 세계적 선구(先驅)로 평가 될 거북선(龜船)의 건조에 착수하였다.


③업 적

이순신(李舜臣)은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의 취임 이듬해인 임진(壬辰)년, 즉 그가 48세 되던 1592년(선조 25년) 3, 4월경에는 새로 건조된 거북선(龜船)에서 지자포(地字砲)를 쏘는 것을 시험하고 있었다. 이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4월 13일 드디어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 직접 파병된 일본군 병력이 도합 2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의 침략전쟁이었다.


제1차 출전으로, 이순신은 5월 4일 새벽 전선(戰船 : 판옥선) 24척과 협선(狹船) 15척 등 모두 85척의 함대를 이끌고 출동, 5월 7일 옥포(玉浦)에 이르러 3회의 접전에서 왜선 40여 척을 섬멸하는 큰 승리를 거둠

49세, 1593년(선조 26) 7월 14일 본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겼으며, 8월 15일에는 수사의 직에 더하여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임명되었다. 한편 호남(湖南)으로 들어오는 피란민들을 돌산도(突山島)에 입주케 하는 등, 민생문제의 해결과 장기전에 대비한 둔전(屯田)을 조직적으로 추진하였다. 50세, 1594년(선조 27) 3월 4일의 두 번째 당항포 해전에서 적선 8척을 분파, 9월 27일의 장문포해전(長門浦海戰)에서는 적선 2척을 격파, 10월 1일의 영등포해전에서는 곽재우(郭再祐), 김덕령(金德齡)과 약속하여 장문포의 왜군을 수록을 협공하였다.

51세, 1595년(선조 28) 2월 27일 조정에서는 이순신과 원군 사이의 불화를 염려하여 원균을 충청병사로 전직시켰으나, 52세 되던 이듬해에는 원균의 중상과 모함이 조정내의 분당적(分黨的) 시론에 심상치 않게 파급되고 있었다. 시기를 같이 하여 11월에 코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의 막하간첩 오시라(要時羅)는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를 통하여 도원수 권율(權慄)에게 '카또오 키요마사(加淸正)가 오래지 않아 다시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그 날 조선 수군의 백승의 위력으로 이를 잡지 못할 바 없을 것인즉.......' 하며 간곡히 권유하였다. 이 요시라의 헌책(獻策)이 조정에 보고되자, 조정 또한 그의 계책에 따를 것을 명하였다.

53세, 1597년(선조 30) 1월 21일 도원수 군율이 직접 한산도에 이르러 요시라의 헌책대로 출동 대기하라고 명을 전하였으나, 이순신은, 그것이 필경 왜군의 간계(奸計)일 것임이 분명하여 함대의 출동을 자제하였다. 도원수가 육지로 돌아간지 하루만에 웅천(熊川)에서 알려오기를 '지난 정월 15일에 왜장 카또오(加藤淸正)가 장문포에 와 닿았다' 하였다. 일본측 기록에는 정월 14일(일본력 13일) 서생포(西生浦 : 울산 남쪽)에 상륙한 것으로 되어 있다. 2월 26일 함거(檻車)에 실려 서울로 압송되어 3월 초 4일에 투옥(投獄) 되었다. - 이것이 이순신이 당한 세 번째 파직이었다. 판중추부사 정탁(鄭琢)이 올린 신구차(伸救箚, 구멍탄 원서)에 크게 힘입어 도원수 권율 막하의 백의종군(白衣從軍) 하명으로 특사 되었다. 4월 1일, 28일간의 옥고(獄苦) 끝에 석방된 이순신은 권율의 진영이 있는 초계(草溪)로 백의종군의 길을 떠났으며, 아산(牙山)에 이르렀을 때 어머니의 부고를 받았으나 죄인의 몸으로 잠시 성복하고 바로 길을 떠나야만 했다......


54세, 1598년(선조 31) 2월 18일 고금도(古今島)를 본거지로 선정하여 진영을 건설, 피난민들의 생업을 진작시켰다. 7월 16일에는 명(明)나라 수군도독 진린(陳璘)이 수군 5,000명을 거느리고 도착, 조선수군과 합세하였다. 8월 19일(일본력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일본 후시미 성에서 사망하자, 왜군은 일제히 철군을 시작하였다. 순천(順天)에 있던 코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는 진린과 이순신에게 뇌물을 보내며 퇴각로의 보장을 애걸하였으나, 이순신은 '조각배도 돌려보내지 않겠다(片帆不返)는 결연한 태도로 이를 반각(返却)하였다. 진(陳)도독과는 의견의 대립이 있었으나, 이순신의 설복으로 합세하게 되었다. 드디어 조명(朝明) 연합함대는 11월 18일 밤 10시쯤 노량(露梁)으로 진격, 다음날 새벽 2시경, 여러 왜장들이 이끄는 500여 척의 적선과 혼전난투의 접근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 마지막 결전이 고비에 이른 11월 19일 (양력 12월 16)* 새벽, 이순신은 독전중 왼쪽 가슴에 적의 탄환을 맞고 전사하였다.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은 것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며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순신의 상여는 마지막 진지였던 고금도(古今島)를 떠나 12월 11일경에 아산(牙山)에 도착, 이듬해인 1599년 2월 11일에 아산 금성산(錦城山) 밑에 안장되었으나, 전사 16년 후인 1614년(광해군 6) 지금의 아산시 음봉면(陰峰面) 어라산(於羅山) 아래로 천장(遷葬)하였다.

이순신의 전사 후 12월 초 4일에 우의정(右議政)이 중직되었고, 1604년(선조 37) 10월 조정의 논공(論功)으로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녹훈되고 풍덕부원군(豊德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좌의정(左議政)에 주증되었다. 몰후 45년인 1643년(인조 21) 충무(忠武)의 시호가 추증되었고, 1704년(숙종 30) 유생(儒生)들이 발의, 상소하여 1706년(숙종 32) 아산에 현충사(顯忠祠)가 세워졌다. 몰후 거의 200년이 지난 1793년(정조 17) 7월 1일, 정조대왕(正祖大王)의 뜻으로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중, 1795년 (정조 19)에는 역시 정조대왕의 명에 따라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 全書)》가 규장각 문신 윤행임(尹行恁)에 의하여 편찬, 간행되었다.

명나라 수군도둑 진린(陣璘)은 수개월간 진(陣)을 같이 함으로써 이순신을 가장 깊이 알았던 유일한 타국인이자 그의 죽음을 가장 슬퍼했던 한 사람이었다. 진린은 명나라 현황제(顯皇帝)에게 이순신의 공적을 자세히 아뢰어 명나라 조정에서는 명나라 도독인(都督印)을 비롯한 팔사품(八賜品)을 내리게 된 것이다.


④평 가 : 무수한 시련 속에서 끊임없이 고뇌했지만 결코 비겁하게 물러나는 길을 택하지 않은 비범한 무인의 삶

500년이 지난 지금, 이순신의 영웅성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32세의 늦은 나이에 무관을 걷기 시작한 이순신. 그는 중요한 시기마다 항상 시련을 맞곤 했다. 훈련원에서 근무할 때 병조정랑 서익의 인사 청탁을 거부함으로써 후에 군기경차관(왕의 특명으로 지방에 파견되어 실무를 조사해 보고하는 특사)으로 파견된 서익의 보고서로 파면을 당했고, 발포 만호였을 때는 상관이었던 전라좌수사의 눈 밖에 나서 근무 성적을 최하위로 받을 뻔 한 사건도 발생했다. 조산호 만호가 되어 북방의 여진족을 막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 여진족의 침입으로 피해를 입어 백의종군에 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자신의 길을 우직할 정도로 묵묵히 걸었던 그 포기하지 않는 힘이 있었다. 수많은 고난과 좌절이 그를 엄습했지만 그는 우회하지 않고 항상 정면 돌파로 일관했다. 나는 이순신의 ‘적’들을 눈여겨보았다. 이순신은 안으로는 자신과, 밖으로는 무능한 조정과, 대외적으로는 일본과 싸움을 벌였다. 그러한 싸움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1589년 정여립의 난이 일어나 이와 연관되어 집안이 몰살당한 전라도사 김대중의 가택 수사에서 이순신의 편지가 발견되었을 때, 가택 수사를 한 관리는 이순신의 처벌을 우려해 편지를 없앨 것을 제의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공적인 수색 문건 속에 들어 있는 것이므로 사사로이 없애면 안 된다고 하면서 그대로 가져가게 했다. 이순신은 모든 일을 이렇게 정면 돌파했던 강인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이순신은 결코 태어날 때부터 영웅, 하늘이 내린 영웅이 아니었다. 그도 우리처럼 피가 흐르는 인간이었다. 이순신은 결코 태어날 때부터 영웅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시련 속에 자신을 내맡기고 무인의 강골로 일관된 길을 걸었다. 그는 진정 평범에서 비범으로 나아갔고, 스스로를 단련시킨 진정한 영웅이었다. 시련 속에 자신을 내맡기고 무인의 올바른 강골로 일관한 그의 삶은 이순신을 역사에 등장시켰고, 그 저력은 조일전쟁의 탁류를 치고 나간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3-2. 세종대왕

①성장배경

세종 임금은 서기 1397년 5월 15일 (태조 6년 음력 4월 10일) 한성부 준수방(지금의 서울 통인동 137번지 일대로 여겨짐: 경복궁 서쪽 영추문 맞은편)에서 조선 3대 임금인 태 종(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휘(이름)는 도, 자는 원정이다.


②관직생활

세종 임금은 1418년 8월 10일(음력) 아버지 태종의 내선을 받아 조선 제 4대 임금에 올랐다. 천성이 어질고 부지런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취미와 재능이 여러 방면에 통하지 않음이 없었다. 정사를 펼침에 있어 국민을 사랑하고, 국민의 어려운 생활에 깊은 관심을 가져, 국민을 근본으로 한 왕도 정치를 베풀었다.

집현전을 두어 학문을 장려하고 많은 인재를 길렀다. 특히 우리 겨레 문화를 높이는 데 기본이 된, 찬란한 문화유산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③업 적

세종대왕은 훌륭한 인품과 실력에 기초한 강력한 리더십으로 한 시대를 묶어버렸으며, 사람들은 그를 따랐다. 그것은 강제된 추종이 아니었으며, 상대방이 자신의 무의식에 스며들어 전체의 삶을 압도할 때 나타나게 되는 바로 그런 유형의 카리스마였다. 이처럼 세종은 용인(用人)술의 대가였으며, 용인술의 대가라는 의미는 다음 네 가지의 매우 단순한 원리를 담고 있다.


첫째, 인재를 알아보는 뛰어난 안목을 갖추고 있었다.

둘째,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셋째, 지속적으로 자기계발을 할 수 있도록 후원했다.

넷째, 성과에 대해 철저하게 보상했다.




1. 인재를 알아보는 뛰어난 안목을 갖추고 있었다.

<장영실>

조선 초는 지배계급이 자신의 특권을 독점하려고 고려 때보다 한층 두텁게 계급 간 이동을 원천으로 차단하는 제도를 만들고 있는 시기였다. 따라서 의관, 역관, 산관 등 특수 기술직 인재은 관료의 신분을 유지해도 엄격히 차별되는 중인 신분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세종은 어느 계급과 계층에서든 자기 능력 이상 발휘하는 자는 스카우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자극제가 될 수 있게 유도하고 싶었다. 이는 신분제도 하에서 자신의 능력을 펼치지 못해 절망해하던 인재들에 대해 최소한의 숨통을 열어놓는 대안의 인사 정책이었다.

이 정책의 가장 큰 수혜자는 장영실로 관노출신인 장영실을 파격적으로 발탁한 것은 지배계급에게 가히 충격적인 인사 조치가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장영실은 뛰어난 인재이기도 했지만 세종은 한 사람의 기대가 다른 사람의 행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지극히 단순한 인간 심리에 근거한 원리를 통해, 학습 분야에서도 경영제도를 강화함으로써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2.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이순지>

이순지는 양반 집안의 준재로서, 친시 문과에 급제한 이른바 앞길이 보장된 톱 클래스 인재였다. 그런 그에게 세종은 중인 계급에서나 맡고 있는 학문인 산학(算學:오늘날의 고급 수학통계학 등을 말한다)을 맡아 연구하라고 특병을 내린 것이다. 그가 보여준 수학적 재능은 천문과 역법을 맡기기에 충분했다.

당사자로서는 자신의 신분보다 낮은 일을 맡으라는 지시가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지는 선뜻 세종의 뜻을 따랐다. 그리하여 그는 과거에 급제한지 3년 후부터 세종의 특병으로 천문과 역산에 깊이 관여했다. 간의대 관측 책임자가 되어 해의 그림자를 상세히 관측했으며, 김담, 김조, 이천, 장영실 등과 협력해 천문 기구의 제작 및 설치에 수학적 기여를 하는 등 주로 천문을 관측하는 일에 전념했다.

그 후 세종의 지시로 김담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초의 서울을 기준으로 한 역법 체제인<칠정산 외편>을 편찬했다. 수학분야의 권위자답게 경기도 일대의 불규칙한 토지 면적을 정확하게 측정하기도 했다. 이는 공정한 세금 징수를 위한 세종 정부의 과세시책에 대해 수학적으로 공로한 것이었다.

15세기 최고의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였던 이순지는 바로 이렇게 탄생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세종의 용인술의 핵심은 바로 ‘적재를 적소’에 배치하고, 그에 따른 보상을 반드시 해준다는 것이었다. 그럴 때 인재는 자라나며, 아낌없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처럼 세종의 인재 육성책은 자기 적성에 맞게 업무 부여를 하는 방식이었다. 만일 세종이 이순지를 일반 업무에 종사케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도 없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조선 최고의 수학자로서 역사에 기억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3. 지속적으로 자기계발을 할 수 있도록 후원했다.

세종은 왕으로서 의무를 다하고자 했으며 ‘의무를 다한다’는 것은 제대로 지시를 내리고 실행하는 것을 의미했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알아야 했다. 모르면서 내리는 지시만큼 위험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왕이면서, 한편으로 ‘멘토(mento)'가 되기로 한다.

멘토란 보통 일반인들보다 해당 분야에서 높은 차원에 이른 사람을 말한다. 세종에게는 국가 업무에 필요한 거의 모든 영역에 걸처 멘토적 성향이 엿보인다.

세종이 멘토라는 얘기는 그가 신하들이 프로젝트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도전을 불어넣어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과 지속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업무에 대한 지시와 지원, 그리고 보호와 장려의 의무를 다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신하를 얼마나 믿고 있는지,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그리고 자신이 추구하는 미래가 과연 어떠한 것인지 매우 폭넓고 구체적으로 깨닫게 해주었다. 나아가 그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팀원들이나 프로젝트에 성공한 팀원들을 찾아가 술과 고기로 회식의 자리를 베풀어주기도 했다. 특히 화포 제작자들에게는 충분한 특별 급여로 가족 부양의 부담을 완전히 덜고 프로젝트에 임하게 함으로써 마침내 개발 과제를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게 했다.

이것 외에도 세종은 자신이 직접 특수한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팀을 발족하고, 성과를 챙겼으며 다양한 문제들을 분석하고 팀원들에게 실무진의 일원으로 조언하기에까지 이른다. 세종이 혁신적인 인쇄술 개량을 위해 국책과제를 설정하고 직접 참여하여 연구한 것이나, 화포 성능 향상 프로젝트 진행시 발사시험 결과를 반영해 새로운 설계도 완성에 관여한 것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4. 성과에 대해 철저하게 보상했다.

<집현전>

집현전은 조선의 장기적 마스터플랜 하에 이를 수행할 특별 기관이었으며, 정책 연구의 체계성과 일관성, 그리고 연속성을 유지하는데 그 구성원의 이직이나 전직이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는 곳이었다.

집현전 소속 인재들은 왕의 관심과 후원을 집중적으로 받는다고는 하나, 직책의 성격상 ‘권력’에 가까이 다가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이른바 ‘출세’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직 희망자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세종은 이들의 이직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집현전 요원들을 평생 다른 부서로 옮겨갈 수 없도록 했다. 또한 최소 10~20년 장기 근속해야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조직에는 없는 ‘사가독서’라는 특별 휴가를 주어 별도로 공부하게 하는 등 특전을 베풀기도 했다. 이른바 ‘당근 정책’까지 펼쳤다는 얘기다. 왕의 이러한 강한 의지에 따라 인재들은 집현전 멤버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강한 정체성과 자부심을 느끼게 했다.


<장영실의 물시계(자격루)>

세종 시대 과학과 IT기술의 유례없는 발전 원동력은 그것을 헌신적으로 떠맡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들은 주로 관료 학자들과 과학자, 엔지니어, 기술자 집단이었다. 그들은 왜 이토록 강렬하게 불타올랐을까? 그들을 움직이는 힘의 하나는 바로 현실적인 ‘보상체계’에 있었다. 그는 신하들에게 물질 및 정신 양쪽 모두에서의 아낌없는 지원을 통해 그들의 열정을 지배하고자 했다. 그렇게 하니깐 당연히 산출물은 커졌고, 팀원들은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연려실기술>은 세종이 신하들의 마음을 붙잡는 데 물질과 마음 모두를 어떻게 적절히 활용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세종 7년 10월에 양각을 준공하여 임금이 친히 내감에 가서 두루 살펴보고 이르기를, ‘기특하다. 훌륭한 장영실이 귀중한 보배를 성취했으니 그 공이 둘도 없다.’ 하고 천민의 신분을 벗겨주고 승진시켜 실첨지를 제수하고, 겸하여 물시계의 일을 살피게 하여 서울을 떠나지 않게 했고, 감조관, 윤사웅 등 세 사람에게 안마(鞍馬)를 하사하시었다.”




④평 가

조선초기에 역사를 보고 있노라면, 하늘을 가릴 것 같은 높은 산을 만나게 된다. 하늘을 가릴 것 같은 높고 높은 세종대왕! 우리민족에게는 한글창제의 한 업적으로도 세종대왕의 위대함이 하늘에 닿는다. 세종은 정말 위대한 인물인가? 박영규의 『세종대왕과 그의 인재들(2002)』의 머리말에서 만나는 문귀이다. 저자는 ‘확실히 그는 위대한 왕이었다. 단순히 왕으로서만이 아니라 대단한 인격자이며, 걸출한 인간이었다. 그에게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있었고,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남다른 용인술이 있었으며, 신분을 따지지 않고 능력을 살 줄 아는 폭넓은 아량이 있었다.


세종대왕! 과학자이면서 수학자였고, 음악가이고 높은 학문의 선비였으며 뛰어난 언어학자였다. 뿐만 아니라 재위 12년 10월에는 몸소 산학을 공부하기도 하였다. 세종이 공부한 것은 산학계몽(算學啓蒙)이라는 수학서였는데, 당시 부제학으로 있던 정인지가 세종의 산학공부를 도왔다. 결국, 칠정산(七政算)을 가능케 하였고, 관측 또는 위치 천문학의 지식이 상당한 수준에 있는 조선초기 최고의 천문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세종은 신중하고, 조심성이 있고, 인내심이 강하며 끈기가 있었다. 세종은 하고자 하는 일은 결단을 내려 끝까지 밀고 나가는 과단성과 추진력이 있었다. 세종은 추상적이거나 모호한 것을 싫어하고, 구체적이고 명백한 것을 좋아하였으며, 종친간에도 우애가 깊었다.


세종은 성과에 대해 분명한 보상 시스템을 갖추고 이를 적용해 나갔다. 그러나 그가 위대한 왕인 이유는 덕을 통해 신하들의 마음을 완벽히 장악했기 때문이다. 세종처럼 모든 신하들의 마음속에 그의 분신이 되고자 하는 열의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진정한 왕이란 실로 드물었기 때문이다.



4. 요약 및 결론

위 2인의 분석대상 인물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모든 대상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인물이며 존경을 받고 있는 분들이시다. 위인들의 일대기(생애)를 알아봄으로서 우리나라 역사에서 혼돈에 빠질 수 있는 자기정체성을 찾을 수 있으며 모델링할 인물을 알아, 내 인생에 있어 스승을 정하고 동일시함으로서 출신가문이나 관운의 유무, 기타 시대적 배경의 유ㆍ불리 등을 불문하고, 누구나 노력여하에 따라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길이 존재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또한 역사적인 위인들 중 강인한 도전정신을 가지고 진로를 개척하는 인물, 무에서 유를 창조한 입지전적 인물, 고도의 전문성을 추구한 인물, 투철한 국가관과 자기희생적 인물 등 모두의 일대기는 순탄한 것이 아닌 것을 깨달아 자신의 진로에 있어 어려운 시련에 놓이게 되었을 때 신념과 끈기를 가지고 물러서지 않으며 지혜로서 이겨낼 수 있는 지침으로 진로를 모색하면서 성공으로 이끌 수 있도록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



5. Key Word

- 애국(愛國), 애인(愛人),투철한 국가관, 개척정신, 정직성, 성실성, 끈기, 시련에 굴복치 않음, 미래를 향한 도전 정신




6. 참고문헌

• 김병숙, 청소년의 진로대리학습을 위한 역사적 인물조사 및 진로대리학습모형, 2006, 한국직업교육학회

• 김병숙, 2007년도 직업학과 워크숍, (2007 은학의 집)

• 김 훈, 위인 모음자료

• 전경일, 위대한 CEO 세종대왕

• 성웅 이순신 인터넷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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